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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천히바람 Jan 06. 2024

독학으로 심리학 공부 18

우수 - 안톤 체호프

젊은 마부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도 무척 말을 하고 싶었다. 아들이 죽은 뒤 일주일이 지났지만,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걸 천천히 털어놓고 싶다. 아들이 어떻게 병에 걸렸는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또 어떻게 죽어갔는지에 대한 것들을 말하고 싶다. 장례식을 어떻게 치렀으며, 아들의 옷을 가지러 병원에 갔을 때 어땠는지 말해야 한다. 시골에는 딸 아니시야만 남았다. 그 딸아이에 대해서도 말을 해야 한다.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듣는 사람은 가슴을 치며 한숨을 내쉬며 슬프게 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대가 여자라면 더 좋을 것이다. 그 여자가 아무리 바보라 하더라도 단 두 마디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 것이다.

'말이나 보러 가야지.' 이오나는 생각했다
'아직 자기는 일러. 잠은 나중에라도 실컷 잘 수 있어.'
그는 외투를 입고 말을 매어 둔 마구간으로 갔다. 가는 길에 그는 귀리며, 건초며, 날씨에 대해 생각했다. 혼자 있을 때는 아들에 대해 생각하면 안 된다. 누군가 이야기할 상대가 없을 때 외로이 아들에 대해 생각하거나, 그 모습을 떠올리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워지고 만다.

"건초를 먹고 있니?
이오나는 반짝이는 말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먹어라, 먹어! 귀리 값을 못 벌었으니 건초라도 먹어야지. 그래, 마차를 끌기에 내 몸은 너무 늙어버렸어. 내가 아니라 아들 녀석이 끌었어야 했는데. 그 앤 참 훌륭한 마부였어. 그 녀석이 살아만 있다면..."
이오나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봐라! 쿠지마 이바노비치는 이제 없어. 먼 곳으로 떠나버렸단 말이지. 아주 허망하게 죽어버렸단다. 자, 너에게 새끼가 있었고, 너는 그 새끼 말의 엄마라 치자. 그런데 그 새끼 말이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면 어떻겠니? 무척 괴롭고 슬프겠지?"

늙은 말은 건초를 먹으며,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주인의 손에 입김을 내뿜기도 했다. 이오나는 아주 열심히 자신의 모든 것을 말에게 들려주었다.

- 안톤 체호프 <우수> -



늙은 마부 이오나는 아들의 죽음으로 넋이 나가 아무에게나 자신의 슬픔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아들과 함께 마차를 몰 때는 몰랐던 그 깊은 외로움과 시골에 홀로 남겨진 딸 걱정에 이오나는 속마음을 쏟아내고 위로를 받아야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들어줄 이는 정말 아무도 없다. 이오나는 말에게 찬찬히 그 슬픔을 이야기한다.


책을 읽다 제목처럼 우수와 외로움이 밀려와 나라도 그의 얘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얼마나 슬프냐고 그래도 사셔야 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동물과 아무리 친밀하다 하더라도 사람의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중학교 사회시간에 우리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것을 배웠다. 이 말이 왜 생겨났는지가 살수록 명확하게 이해가 된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의미는 법과 경제, 도덕 등의 거시적인 것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소한 위로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몇 년 전에 내게 힘든 일이 있었다. 살면서 힘든 일도 당연히 많았지만 그 일의 상대는 인생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악질이었다. 그 무렵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은 예의상 나에게 어떻게 되어가는지 물었다. 그러나 5분도 지나지 않아 주제를 돌렸다. 나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풀고 위로받고 싶었다. 나 대신 흥분하고 욕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내가 친구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내 얘기를 5분, 아니 3분도 들어주지 못했을 때 그들과는 고민을 나누는 사이가 아닌 놀러 가거나 즐거울 때만 만나는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본인이 어려움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남의 슬픔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도 잘 깨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분함을 이기지 못해 말이 길어졌다. 물론 듣는 사람의 표정은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멈춰지지 않았다.


그때 내 말을 나보다 더 잘 들어주었던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친구들이 있었다. 매일 전화를 걸어 내 안부를 묻고 한 시간 넘게 내 분노에 찬 이야기를 들어주던 친구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서로 끈끈하게 되었고 서로를 진심으로 챙기고 고마워한다. 당연히 우리는 서로의 편이 되어 함께 흥분하다 잠시 후 그래도 진정하고 사실관계를 다시 확인하자고 솔직한 충고도 곁들인다.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진짜 내편이 누구인지 분간이 된다. 모임 때마다 나를 찾았던 친구는 내가 힘들 때는 나를 찾지도 내 얘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내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으나 나는 선을 그었다. 왜냐하면 나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론 마지막 순간에 결국은 혼자이지만 살아 숨 쉬는 순간에는 좋은 것을 함께 보고 맛있는 것을 함께 먹고 좋은 이야기를 나눌 존재가 필요하다. 모르는 사람과 그러한 과정을 함께 하면 지인이 되고 거기에 슬픔을 함께 나누면 친구가 되는 것이다. 살아보면 인간은 성선설도 성악설도 다 맞다. 이런 복잡하고 나 혼자 대처하기는 불가능한 세상살이에서 내 편이 있다는 사실은 저절로 어깨를 으쓱 솟구치게 만든다.


나는 친구가 외로울 때, 힘들 때 자주 전화를 할 것이다. 혼자가 되어 힘든 사람들이 주위에 보이면 먼저 아는 체하고 인사를 할 것이다. 지나가는 다정한 한마디가 혹시나 힘이 될까 열심히 오지랖을 떨 것이다. 혹시 누가 아는가 그 외로운 사람이 이오나 노인처럼 자신의 말을 들어줄 상대가 필요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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