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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천히바람 Jan 04. 2024

뜬금없는 꿈의 해석 2

노인과 바다

산티아고는 벌써 몇 달째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 다들 그를 '한물간 퇴물 어부' 취급하지만, 그를 친부모처럼 따르고 챙기는 소년만은 산티아고를 최고의 어부로 인정한다. 소년은 산티아고에게 고기 잡는 법을 하나하나 배웠다. 끼니를 못 챙길 정도로 가난한 산티아고를 위해 소년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다주며 애처롭게 눈물짓는다. 그러던 어느 날, 산티아고는 배를 타고 바다 멀리 나가 드디어 거대한 청새치 한 마리를 발견한다. 평생 고기잡이만 해 온 산티아고도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실로 아름답고 커다란 청새치였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어구는 물론 체력까지 바닥난 산티아고는 혼자서 이 강력한 물고기와 대적할 상황이 아니었다. 산티아고는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상황에서 소년을 생각한다. "그 애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애는 나를 도와줄 테고, 이런 멋진 구경도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프랑스 격언 중 이런 말이 있다. "젊음이 알 수만 있다면, 그리고 늙음이 할 수만 있다면!" 젊음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인생의 지혜를 알지 못하고, 늙음은 무엇이든 알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을 해낼 체력이 부족하다.


드디어 결전의 순간이 다가온다. 청새치를 잡으러 온 힘을 다해 몇 날 며칠 잠을 설치며 사투를 벌이면서도, 산티아고는 청새치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얼마나 커다란 역경을 견딜 수 있는지, 인간이 과연 얼마나 큰 일을 해낼 수 있는지를 증명하고 싶었다. 고기가 엄청난 괴력으로 노인의 초라한 배를 뒤집어 버릴 것 같은 순간에도, 그는 얼마든지 승복하겠다고 마음먹는다. "네가 나를 죽일 셈이로구나. 그래, 넌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 내 평생 너처럼 크고 아름답고 침착하고 위엄 넘치는 고기를 본 적이 없거든. 네가 날 죽인다 해도 조금도 서운하지 않아." "형제여, 어서 와서 날 죽여 다오, 누가 죽든 이제는 상관없구나." 바로 이런 생각을 할 때쯤, 노인이 던져 맞춘 작살이 고기의 배를 갈랐고, 거대한 청새치는 새하얀 배를 드러내고 은빛 바다 위에 누워 출렁인다.  


그러나 이 눈부신 승리는 오래가지 않는다. 더 큰 곤경은 고기를 다 잡은 후에 시작된다. 거대한 상어 떼들이 신선한 피 냄새를 맡고 전속력으로 쫓아온 것이다.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가 노인을 휘감는다. 이 고기가 단순한 노획물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노인은 사력을 다해 상어 떼와 싸운다. 상어에 물려 뜯기고 병신이 되어 버린 청새치를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고 별 볼일 없는 하루를 보냈더라면 이토록 뼈아픈 상실감은 느끼지 않았을 텐데.


그때 산티아고의 메마른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명대사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만한 일에 포기하지 않아. 인간은 넘어질 수 있어도, 결코 무릎 꿇지는 않아." 노인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상어의 누런 눈알을 향해 마지막 남은 칼을 내리꽂는다. 놈은 죽어 가면서도 물어뜯은 고기를 삼키고 있다. '이것이 생명이구나' 느끼는 순간이다. 죽는 순간에도 결코 욕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사력을 다해 몰려드는 상어 떼와 싸웠지만 결국 고기는 거의 뼈만 남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노인이 실종된 줄 알고 구조대까지 출동시켰지만 그는 궁극적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기진맥진하여 잠들어 있던 산티아고는 자신을 위해 커피를 가져온 소년을 본 순간 새로운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다 잡은 고기를 상어에게 빼앗겼지만,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거대한 청새치보다도 더 커다란 생의 기쁨을 깨달은 것이다. 바로 소년과의 끈끈한 우정이었다. "얘야, 그동안 네가 없어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아니." 실로 오랜만에 산티아고는 평화롭게 잠들어 비로소 단꿈을 꾸기 시작한다.


여기서 매우 결정적인 꿈의 상징이 등장한다. 산티아고는 초원을 내달리는 거대한 사자의 꿈을 반복해서 꾼다. 바로 거대한 사자의 이미지야말로 산티아고가 주변의 온갖 멸시 속에서도 남몰래 간직해 온 '진정한 자기 이미지'인 것이다.


노인이 초원을 달리는 사자의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는 것은 여전히 그가 영혼의 젊음을 잃지 않았다는 걸 증명한다.


-정여울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 작가의 찬찬한 설명으로 노인과 바다를 이해했다. 고전 걸작은 나이 들어 다시 읽어야 제대로 이해가 된다. 노인, 소년, 청새치, 상어, 사자 모두 문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상징하는 바가 있겠지만 단순한 나의 느낌적 해석은 노인의 사무친 절절한 외로움이 먼저 와닿는다. 마음만 초원을 호령하는 사자이면 무엇하나? 살아있는 온기를 지닌 인간의 따스함이 그리운 것을. "네가 나를 죽일 셈이로구나. 그래, 넌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 노인은 존엄을 가진 존재에게 자존심을 지키며 죽어도 미련이 없다. 그러나 실상은 노인을 위엄 있는 사자로 인정해 주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소년이 함께 있기를 몹시도 간절하게 그리워한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청새치에게 죽어도 상관은 없지만 소년이 곁에서 다정한 말을 걸어주고 사소한 심부름을 해주며 멋진 풍경을 함께 볼 수 있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청새치에게는 죽어도 상관없지만 힘만 무식하게 세고 다른 생명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없고 오직 자신의 욕망과 삶에만 충실한 상어에게는 절대로 죽임을 당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아무런 저항 없이 노인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 나는 무식하고 예의 없고 돈만 많은 사람들에게 하찮게 취급받는 것이 무척이나 싫다. 돈과 권력만 믿고 함부로 타인을 대하는 뉴스에 등장하는 그 많은 인간들이 상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예의와 상도덕도 없이 남이 잡아놓은 물고기를 덥석 빼앗으려 떼로 몰려오는 그 살기 가득한 족속들. 죽는 순간까지 고기의 살점을 놓지 못하고 삼키는 욕망까지 어쩌면 이렇게 인간의 저 밑바닥을 보여줄까.


한 소년의 예의와 사랑이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 노년의 삶에 얼마나 소중한지 노인과 바다가 아니라 '노인과 소년'이 제목으로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굳이 늙은 노인이 아니더라도 삶에서 나를 걱정해 주고 존중해 주며 커피 한 잔 따뜻하게 대접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삶을 계속 살아내야 할 아름다운 이유이다. 바다라는 인생의 거친 고난의 항로에서 잠시 땅이라는 보금자리로 돌아왔을 때 아무도 내 존재를 몰라주면 바다와 땅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꿈의 해석에 노인이 꿈꾸는 자신의 이미지가 '사자'라서 슬펐다. 늙고 힘이 빠진 사자가 생각나서 이빨 빠진 호랑이 같았다. 고함을 지르고 포효해도 토끼조차 하찮게 쳐다볼까 걱정이 된다. 차라리 나무나 바위였으면 어땠을까?


그나저나 노인에게 소년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헤밍웨이에게도 그런 소년이 있었다면 생을 계속 이어갔을까? 걸작을 쓴 작가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인간의 온기를 지닌 따뜻한 소년이 아니었을까? 나의 노후에도 저런 소년 한 명이 있었으면. 그리고 나도 사자의 심장을 가진 노인에게 저런 햇살 같은 소년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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