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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천히바람 Jan 02. 2024

뜬금없는 꿈의 해석 1

슬픔은 '행복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당신이 그 슬픔의 내밀한 속삭임에 충분히 귀 기울일 수 있다면. 우리가 슬픔에 굴복하지 않고 슬픔 속에서 더 깊은 생의 진실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 정여울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꿈을 꾸면서도 내가 이 꿈을 왜 꾸는지 의아했다. 놀라서 눈을 떠보니 4시 40분. 다시 잠들 수 없는 걸 알기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30년이나 지났고 별 의미를 두지도 않았던 사람이 왜 꿈에 나왔을까? 도대체 내 무의식 어디에 저장이 되었다가 왜 갑자기 나타나는 걸까? 분명한 것은 지금은 잊어버렸지만 당시에 나는 억울하고 분했다는 것이다. 왜 이 꿈을 꾸었는지는 내가 해석해야 할 문제이다. 어쭙잖게 프로이트와 융이 되어 나를 들여다보아야겠다.


나름 지금보다 훨씬 순진하던 20대에 담당 책임자로 나이 많은 H가 왔다. 차장급 나이에 직급은 대리였는데 다른 회사를 다니다 이직한 걸로 들었다. 우리 팀의 막내였던 나는 모나지 않았고 성실했지만 애교가 많거나 미인계로 남자 직원을 설레게 하지는 못했다. H는 여직원의 살가움과 애교 그런 걸 좋아했고 직원에 대한 호불호가 심했다. 그리고 유독 나에게는 쌀쌀맞았다. 결재를 올려도 내것은 맨 나중에 했고 인사를 해도 표가 나게 받지 않거나 냉랭했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고 해도 이유가 없었다. 약자에 대한 가스라이팅이나 강약 약강, 강한 사람에게는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강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외모나 목소리가 상당히 점잖아 설마 그런 사람일리가 없다는 생각을 심어주었고 나만 몹시 불편했다. 인사나 결재 외에는 주눅이 들어 말을 걸 수 없었다. 지금은 그러거나 말거나 본인의 덜 된 인격문제로 치부하지만 그때는 왜 나한테만 그러는지 억울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트집을 잡고 핀잔을 주니 더 주눅이 들었다.


발령철이 오면 대낮부터 취해서 자리를 비우고 저녁 늦게 들어와서 자기보다 못한 놈이 승진을 한다고 술주정을 하고 분위기를 험악하게 몰아갔다. 선배들도 퇴근을 해야 했기에 H의 비위를 맞추며 참으시라고 편을 들어주고 달래주었다. 물론 본인이 승진을 못해서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만 발령 때마다 그러는 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우리 팀은 결재를 받지 못해 퇴근도 못하고 쓸데없는 정리만 하면서 좌불안석이었다. 집에 가서 애를 봐야 하는 선배언니들이 하나 둘 조용히 사라지는 틈을 잘 맞춰 같이 퇴근을 했다. 밑에 직원들이 승진을 안 시켜주는 것도 아닌데 만만한 사람에게 화풀이하면서 본인이 센 척을 하였다. 나를 무시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허풍을 참으로 치졸하게 천명했다. 


다음 날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고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고 앉아 인사를 받기만 하였다.  보통 발령철이 되면 회식을 하였다. 그날도 식사를 하고 2차를 어디로 가느냐 정하고 있길래 여직원들과 길거리 좌판 구경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누가 청바지를 입은 내 엉덩이를 찰싹 세게 때리는 것이었다. H였다. 평소 친한 것도 아니고 술김이라는 핑계로 제일 어린 나에게 성희롱을 한 것이었다. 심지어 H는 딸을 둔 유부남이었다. 다들 자기가 당한 일이 아니니 놀라움을 숨겼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2차 장소를 향해 가버렸다. 그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기억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얼마 후 장소는 기억나지 않는다. 마주 보고 오던 그가 이번에는 치골을 때렸다. 너무 황당했다. 그리고 유유히 사라졌고 나는 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번에는 다 있는 곳에서 엉덩이, 이번에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치골을 때린 그가 너무 사람 같지 않았다. 점잖은 얼굴의 중년 유부남이 20대의 여직원에게 해야 할 행동은 아니지 않나. 특히 본인이 항상 의리 있고 정의로운 것처럼 과시하면서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 가짢았다. 


그러다 다른 지점에서 일하고 있을 때 H가 업무차 온 적이 있었다. 나는 그가 들어가는 뒷모습을 봤지만 마주친 것도 아니고 당연히 반갑지 않았기에 아는 체도 인사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업무 중이라 아무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H가 인사도 하지 않는다고 나를 욕했다는 얘기를 누군가에게 들었다. 그때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본인이 받을 것만 챙기는 H의 뒷말에 타격이 일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손버릇을 얘기했다. 내가  공개적으로 따졌어도 본인은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 난리를 치거나, 혹시 본 사람들이 만의  하나 증언을 해도 (남의 일에는 모른 척할 것이 분명하지만) 술김이라는 말로 용인되었을 것이고 당한 여직원이 누구인지만 가십거리가 되었을 것이기에 지금도 입을 다무는 쪽이 억울하지만 2차 가해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후 H는 회사를 그만두고 인력회사를 차려 사장이 되었고 그 인력을 쓰는 인연으로 남편과도 아는 사이였다. 한 번은 남편이 H 얘기를 하기에 예전에 그 사람이 나에게 한 짓을 얘기했더니 미친놈이라고 씩씩거렸다. H의 딸이 회사에 입사했을 때 나는 얼굴도 모르지만 그 아이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나도 회사를 퇴직했고 더 이상 H에 대해서 들을 일도 없다. 이제 반백년을 살고 나니 세상엔 이런 사람과 저런 놈이 있다는 것을 안다. 지금 만약 누가 엉덩이를 때리면 나도 똑같이 때리거나 세상 부끄럽게 큰 소리로 왜 그러냐고 소리치겠지만 그때로 돌아가면 여전히 아무 말 못 하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만 가득할 것이다. 


어젯밤 H가 나온 꿈은 뜬금없지만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내 젊고 아름답지만 어설펐던 20대의 억울함을 위로하고 넘어가라는 무의식의 발현 같다. 원래 그런 놈이면 덜 억울했겠지만 사람 봐가면서 약자에게만 부당한 짓을 하며 점잖은 척했던 H가 지금 어디서 잘 살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다. 그런 인간에게 내 관심의 1%도 주고 싶지 않다. 우주가 알어서 대가를 주리라 믿는다.  본인은 지나간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주는 우리가 내뱉은 말과 행한 행동이 사라지는 곳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착하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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