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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야 Feb 12. 2022

3. 밥솥이 생겼다. 환경호르몬을 피하라구?

서른 살, 밥은 해 먹고 살 수 있을까?

 집에서 먹은 끼니는 손을 꼽을 정도인데 벌써 만으로는 4년을 꼬박 채우고, 햇수로는 6년차 자취생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6년차라니. 마치 나이만 먹고 정신연령이 그대로인 내 알맹이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요리를 좋아하는 동거인 덕에 가끔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도 배는 안 곯고 살았지만, 우리 집에 없는 물건이 하나 있다. 바로 밥솥이다.


 사실, 맨몸으로 언니 집에 얹혀 살기부터 시작해서(이사를 입사 두 달 뒤에 해서) 생활에 필수적인 가전 말고는 언니가 기존에 가지고 있지 않던 가전제품까지는 살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도 있고, 안 먹을 땐 한 달 내내 가스비 1원도 나오지 않는 수준으로 살기 때문에 굳이 필요하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햇반이라는 희대의 발명품(?)이 있었다. 건강이 걱정되면 발아현미밥이나 잡곡밥 등 여러 옵션도 있고, 한 공기 데우면 짜게 먹는 두 자매가 다른 반찬과 배불리 먹기도 좋았다. 가끔 소포장으로 사면 조금 비싸단 생각도 했지만, 박스로 샀다가 유통기한 넘겨 먹은 날도 있었던지라 쌀로 해먹었으면 더 관리가 어렵겠다- 싶었다. 가끔 생기는 쓰레기가 좀 환경에 미안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러던 어느 초겨울날, 병에 걸렸단다. 자궁근종. 용종도 발견됐다. 어... 물혹이랑 다른가? 사실 병원 가서 들을 때는 뭐라는지도 잘 몰라서, 가볍게 느끼고 있었는데 선생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집에 가서 찬찬히 찾아보고, 석달 뒤 추적관찰을 해 보자고 했다.


 오는 길에 찾아보는데 확실히 가벼운 게 아니었고, 수술도 필요했고, 재발도 고. 완치는 자궁을 절제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하면 임신은 할 수 없다고... 안 그래도 허리가 좋지 않아서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다니긴 했지만, 내가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차이는 컸다. 너무 무서워서 남자친구에게 말했더니 대수롭지 않게 안그래도 생리통 심한데 생리 안 하면 좋지 않아? 라고 해서 더 상처 받아버렸다. 약간 하자상품이 되는 기분과 이 사람은 나랑은 정말 아이 가지 생각이 없구나, 하는 생각. 이것저것 생각이 짬뽕이 되어 우울하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간신히 정신차리고 나서는, 우습게도 추적관찰 날짜가 신경쓰였다. 세달 뒤 생리주기는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고, 나는 그 때 수술하면 부서에서 썅년이 될 수 있었다. 일단 혹시 모르니 부서원들에게 밝히긴 했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던 찰나, 서른 살이 되어서 이제 건강검진을 신청하라는 메일을 받고 이거다, 싶어 추적관찰 한달 전으로 신청해버렸다. 두달 간 좋은 거만 잘 먹고 살아야지, 하고. (물론 연말-생일 풀파워로 살은 더 찌고 말았지만...)


 아무튼 그놈의 근종에는, 빨간 고기도 안 좋고 우유도 안 좋고 자몽, 석류, 홍삼, 밀크씨슬, 그리고 환경 호르몬도 좋지 않다고 했다. 뭐야 못 먹는데 왜 이렇게 많아, 라는 생각도 잠시. 환경호르몬을 피하면 편의점 음식들이랑 그리고 무엇보다도 햇반, 햇반을 먹을 수 없다. 이거만 그냥 먹을까, 최근에 산 지도 얼마 안 됐는데... 고민 끝에 전에 전기밥솥 필요하면 말하라던 옆 동 동기에게 연락했고, 고맙게도 밥솥을 얻었다!


종이컵으로 계량! 불리기도 성공적... 작은 듯 안 작은듯.

 나는 작은 밥솥이래서 정말 작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에어프라이어보다는 컸다. 싱크대 선반 구석에 들어갈 자리가 그래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도전한 인생 첫 밥. (엄마한테 퍼온 쌀이었다, 예전에 배 곯으면 친척네서 쌀 받아온다는게 이런 거였을까?) 윤기가 좔좔 흐르고, 평소엔 현미밥만 먹다가 먹은 백미는 정말 부드러웠다. 물론, 아직 할 줄 아는 건 계란간장밥뿐이라 그렇게 먹었지만, 서른 직전에 성공한 첫 밥이라 뭔가 뿌듯한 기분이었다. 좋아, 이제 밥은 해 먹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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