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에 갔더니 엄마가 봉다리에 담긴 초록 무언가를 스윽 꺼내주셨다. 이게 뭔데? 하니 부르르 떨면서 '고수'라고 하시더라. 친구 분이 농사지어서 주셨는데, 거절해도 거절해도 맛있다며 억지로 한 단 안겨주셨다며. 아니 이 맛있는 걸 왜 거절했대...! 하마터면 못 먹을 뻔 했잖아?
고수. 코리앤더. 팍치. 또 뭐있지, 아무튼 내 사랑. 한국인들이 이 친구를 싫어하는 이유는 고수를 향수? 비누? 같은 향으로 느끼는 무슨 수용체가 많아서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한 번도 그렇게 느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예전에 후배가 고수 듬뿍 들어간 태국의 오리 어쩌구 컵라면 먹을 때 선배 왜 퐁퐁 먹어요 했던 기억이... 있는데(그땐 좀 충격먹었었다), 나중에 수용체인지 유전자인지 하는 기사를 보고 그 친구가 내가 먹는 걸 그냥 마냥 극혐했던 게 아니라는 걸 깨닫긴 했다. 아무튼! 비염 탓인지 개인적으로 향신료를 많이 좋아하는 편인데, 그 중에서도 요알못 치고는 꽤나 사용법을 잘 알고 있는(?) 식재료를 받아서 신났다.
그 다음 월요일, 출근길에 먹을 만큼의 고수를 잘라서 나가야지!(절대 일요일에 미리는 안 한다) 했더니, 아이쿠. 어머니가 얼마나 싫으셨으면 흙도 안 터셨네... 일단 포기하고 퇴근하고 먹어야지 하며 하루 종일 회의 때도 뭐에 먹지, 하고 행복한 고민을 했다.
일단 양이 많으니까 쏨땀도 해봐야지!
며칠은 잘라서 회사에서 비빔밥에 넣어먹어야겠다!
-정도의 계획을 같은 고수 덕후 부서 선배에게 공유했더니, 어차피 파파야 사려고 마켓컬리 들어가는 거라면 쭈꾸미 볶음도 사보라고 추천을 받았다. 고수가 미나리과라 야채들 사리에 넣으면 잘 어울린다고!맵찔이라 걱정했지만 하나도 안맵다고 하셔서 믿고 호기롭게 카드를 긁어봤다.
<1. 당근 쏨땀>
신나게 퇴근하던 길, 당근을 안 산걸 깨닫...고 급하게 마트에서 당근을 샀다. 와. 당근 한개에 700원 밖에 안 하는구나. 식재료를 사본 일이 있어야지. 근데 몇 개나 필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막상 사고 나니 당장 뭐라도 하고 싶어서 당근으로 먼저 야매 쏨땀 도전. 아, 레시피는 예전에 태국에서 친구랑 들었던 쿠킹클래스 레시피를 참조했지만, 집에는 당근과 마늘과 방울토마토, 피쉬소스뿐이었다. 일단 작은 채칼을 들고 시작!
당근은 강했다.
많이 비어보이는 첫 (당근) 쏨땀
당근은 생각보다 엄청 단단하고, 채칼로 세줄씩 썰기에 당근 한개는 정말 많았다. 거의 한 시간을 깎아서 본죽통으로 하나를 만들자, 손이 아주 난리가 났다. 그치만 소스는 역시 하라는 대로 하니까 괜찮았고, 사실 토마토가 모든 감칠맛을 만들어 줬다. 괜찮은 한 끼였다. 근데 다 하고 깨달았는데, 고수는 토핑이고 거의 들어가지 않더라(사실 그 뒤로도 그냥 생략했다 그래서).
<2. 고수 비빔 국수>
1인분 포장이 되어 있던 방울토마토 용기에 넣어서 출근!
다음 날은 잘 다듬은 고수를 들고 출근했다. 이건 어디 쓰이는고 하면, 회사 밥에 넣어 먹으면 맛있다(부서원들은 싫어했다). 마침 비빔국수가 나오길래 맛있게 넣어 먹었다. 아니 비빔 소스랑 정말 잘 어울린다니까요? 봄에는 고수를 길러먹었었는데, 요리는 못하지만 이렇게 항상 잘라서 회사가서 잘 먹었었다.
<3. 닭발과 함께>
퇴근하고는 컬리를... 쏨땀을 시도해보려 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닭발에 콜!을 외쳐서. 직접 기른 라임과, 까먹고 적지 않았지만 고수랑 같이 주신 민트로 만든 모히또와 함께. 아니 닭발이랑도 고수가 이렇게 잘 어울린다니요...! 새 조합을 찾았다.
<4. 대망의 쭈꾸미볶음>
아 이건 할 말이 많았다. 맛은 진짜 있었는데... 일단 소스를 붓자마자부터 코에서 콧물이 줄줄줄. 선배가 분명 안 맵댔는데? 그러고보니 선배랑 나가서 마라탕 먹을 때 선배가 매워한 기억이 없다. 속았다. 너무 매워서 집에 있던 반숙란도 투입하고, 우유도 같이 먹었다. 오죽하면 운동 간 사이에 남은 양념에 볶아놓은 볶음밥을 맛본 언니가 당연히 (매워서) 자기 건줄 알고 한그릇을 다 먹어버렸다ㅋㅋㅋ 아이쿠. 다음 날 선배한테 한 소리 했다. 그치만 고수랑 잘 어울리고 맛있었다!
<번외. 성공한 쏨땀>
비주얼적으로 훨씬 근사해진 쏨땀. 300g밖에 안 된다던 파파야가 생각보다 양이 엄청 많아서, 사이사이에 점점 태국요리 재료(그린빈, 팜슈가, 땅콩가루)가 늘었기 때문! 레시피가 1인분 기준이라 무려 5번을 해먹었다. 포인트는 찧어서 먹는 것이긴 한데(태국에선 절구에 찧어 먹는다), 집에선 아무래도 어려워서 최대한 얇게 채칼로 썰고, 비비면서 짓이기고, 결정적으로 몇 시간 절이듯이 숙성(?)시켜서 먹는다. 맛있지만, 파파야를 한 번 더 사먹는 건 아무래도... 나중 일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