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호야 Feb 13. 2022

4. 강제 편식의 역사

서른 살, 밥은 해 먹고 살 수 있을까?

 나는 미식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사실 둔한 편에 가깝다. 딱히 편식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매운 걸 잘 못 먹는 것 빼고는 누가 메뉴를 골라도 쉽게 오케이를 외치는 편이었다.


 편... 이었다. 과거형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혹은 나이가 들면서 나를 맨 마지막으로 대하던 벌을 받았는지, 아니면 '거참 예민하게 굴기는'에서 늘 그 예민하게 구는 애를 맡는 편이어서 그랬는지. 온갖 병이 점점 생겼다.


 새 직장에 막 들어왔을 쯤, 부서에 상이 생겨서 퇴근 후 배차된 차를 타고 다같이 어느 시골 장례식장에 갔는데, 아직 장례식 경험이 별로 없었어서 회사에서 밥을 먹고 갔다. 다들 열심히 육개장을 먹을 때 할 일이 없었단 뜻이다. 그래도 가만히 있기는 좀 그래서, 안주삼아 내 주셨던 마른아주 종합세트(견과류, 쥐포, 무슨..막대기같은 과자 등등)를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쥐포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삼켰을 때 입 천장부터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하더니 그 무언가가 지금 내 식도, 뱃속 어디를 지나가고 있는지 통증으로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목도 붓고 있었다.


 ...어? 이게 뭐지?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알러지를 위심하고 부위가 목인지라 급하게 물을 최대한 마셔 입을 헹궈냈다(이미 목구멍을 넘어가서 뱉을 수 없었다). 급한대로 동네북...아니 가장 믿음직한 아는 이비인후과 의사에게 연락을 했더니 항히스타민제를 빨리 사 먹으란다. 근데 시골이고 장례식장도 병원이 아니어서, 우선 더 이상의 섭취를 중단하고 최대한 버텨가면서 다시 회사까지 왔다(정말 다행이게도 아프긴 겁나 아팠지만 그 사이에 숨을 못 쉴 정도는 아니었다).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약국들을 순서대로 전화하면서 밤 10시에 오픈한 약국을 겟챠, 바로 약을 먹고 다음 날 주사까지 맞고 정상으로 회복하고, 알러지검사를 추천받아 대학병원에서 알러지검사도 받았다.


방부제 알러지, 설페이트 알러지, 혹은 아황산염 알러지.


 저런 게 존재하는 지 몰랐다. 내 평생에 못 먹는 게 생길 줄 몰랐다(오이는... 오이는 그냥 싫지만). 내 평생의 사랑인 밀가루도 방부제가 많아서 안 되고, 새우도, 치즈도, 와인도, 맥주도. 먹으면 계속 목이 붓고 위험해질 수 있단다. 가공식품에 많이 있고, 가공식품이 아니어도 발효식품은 천연(?) 방부제가 생겨서(그래서 잘 상하지 않는 거라고) 알러지가 있을 거란다. 일단 매일 항히스타민제를 먹고, 심한 날에만 먹으라고 스테로이드제도 처방해줬다(일명 비상약)

. 갑자기 세상이 훼까닥. 변해버렸다.


  의사는 태연하게 집밥을 먹으라 했다. 자취생은 집밥이 없다. 회사 공장밥은... 짜고 맵고 건강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었다. 그나마 건강한 메뉴가 뭘까, 하고 메뉴판 앞에서 멍을 때리다 한 구석에서 발견한 식당 안내판에는 알러지가 있을 시 문의해달라는 번호가 있었다(반년 가까이 다니면서 그런게 있는지 몰랐다). 무려 그 알러지 목록에 아황산염이 있었다!


 와 세상에, 나만 모르고 다들 아는 그런 존재였던거야? 하며 신나게 만난 영양사님은, 자기도 이론으로만 알고 적어놓은 것이며 회사 밥이 직접 만든다고 해도 반조리 식품도 있고, 가공된 재료를 받아오거나 소스에 뭐가 들었는지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사실상 메뉴에 구분해 줄 수 없다고 했다.

최근에 갔다가 알러지가 안 나서 진짜 국산밀 쓴 것 맞군! 하고 재방문했던 빵집에 붙어있던 인증(?)마크. 알고보니 평소에 알러지가 나지 않아 방문하던 다른 빵집에도 붙어있더라.

 그 뒤로 이어진 인체실험 행렬. 특수능력이 생겼다! 국산 밀가루를 맞출 수 있게 됐다. 수입산은 밀가루가 상해서 들어오면 안 되니까 방부제가 미친듯이 들어가서 목이 아프기 때문이다. 홍차가 발효식품이라는 것도 새삼 알게 됐고, 녹차라떼 같은 가루음료도 얼마나 방부제가 많이 들어가는지 한입만 먹어도 목에서 피맛이 났다.


 날마다 모든 메뉴를 셀프 기미상궁하며 조심하기를 몇 주, 스트레스가 폭발했다! 그냥 아프고 숨 좀 못쉬고 아무거나 먹으면 안돼?를 외치면서 막 살기를 몇 주, 면역력이 쓰레기가 돼서 피부는 뒤집어지고도 방치하다가 친구와 똑같이 수영장에 다녀왔는데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망할 알러지!그놈의 면역력!


 싫어도 이제는 알러지와 공생을 해야 했다. 음료는 아메리카노랑 라떼만, 아초, 밀크티, 녹차라떼 안녕. 꽈자....는 최대한 안녕. 빵은 최대한 아껴먹고 먹다 아프면 버리기. 치즈는 1000 day 숙성치즈 이런거 대신 최대한 덜한 생치즈나... 최대 브리치즈까지. 술은 증류주!


 이러고 잘 지켰냐 하면, 아무래도 원래 면빵 덕후인지라 몸 눈치를 봐 가면서 살살살 딴짓을 하다가, 야근하면 못 참고 퍼먹고...를 반복하며 20대 중반을 보내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3. 밥솥이 생겼다. 환경호르몬을 피하라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