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얘기를 다시 할까 하다가, 그래도 이 얘기는 마무리가 되었다는 걸 마저 알려야 할 것 같아서 글을 마저 적어 본다. 수요일에 어질어질해 하며 대신 처리한 업무와, 중간에 전화를 끊은 내 태도는 사과드리지만 그래도 이건 네 일이 맞다-고 정리한 메신저에 대해 안읽씹을 하던 상대방이 목요일 오전에 와다다다 폭탄 답변을 보냈다.
니가 말한 게 공식 프로세스라면 공식적으로 메일을 보내면 답변을 주겠다. (너 마음대로 한 거 아니냐고 말한 듯하다.) 시간을 그렇게 짧게 주고 하라고 하는 건 무슨 경우냐. (법적으로 시한이 있는 업무이다.) 안 하면 제재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냐. (법적으로 시한이 있어서 제재가 있는 거고, 저쪽에서 먼저 물어봐서 대답해준 것) 그리고 그게 우리가 다른 부서에 요청하는 게 공식 프로세스라면 문제 있는 것 아닌지 공론화 해달라. (너네 부서 변동인데...?) 또 감정적으로 응대하면 내가 공론화하겠다. (여기서 덜컥 몸이 멈췄다.)
휴가날이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고 저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바로 배탈이 났다. 무시하자니 무시도 또 감정적인 어쩌구저쩌고 하면서 시비를 걸어올 것 같고, 대답하자니 공론화 어쩌구가 맘에 걸려서 나도 보고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휴가 내내 속이 얹혀가며 고민한 결과, 나도 내 상사에게 보고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이 결론을 내린 건 사실 금요일 아침이었다.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시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엉망인 수목을 보내고 목요일 저녁부터 괴로워하던 나는, 결국 뇌가 죽어서 스트레스가 가장 많을 때 주로 하는 짓인 잠을 자 버렸다. 그러고는 딱 일찍 잔 만큼 한두시간 일찍 새벽에 깨서는 '이대로 휴대폰을 끄고 잠수를 탈까, 휴가를 낼까, 때려칠까...'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만 하며 괴로워했다. 이게 뭐라고. 저 아저씨는 씨부려놓고 아무 생각도 없을텐데. 애초에 전화 처음부터 ㅇㅇㅇ 차장입니다. 하고 시작하는 게 젊은 여자애 권위로 끌어내려서 자기 일 대신 시키고 싶었던 것일 텐데. 왜 맨날 이렇게 맨몸으로 끌어내려져서 얻어 맞는 업무를 해야 하는지, 업무에 대한 회의감도 오고 너무 서럽고 억울해서 아침부터 질질 짰다. 나도 서른이면 이제 혼자 내 몫을 해야 할 나이인데 이딴 걸로 울기나 하는 것도 꼴불견이었다.
그래서 그냥 일찍 일어난 김에 빨리 출근해서, 부사에서 가장 일찍 출근하시는 상사에게 이실직고하고 해결책을 문의해야겠다 싶었다.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이메일을 인쇄해서 ㅇㅇ님, 커피 사주세요. 하고 내려가려는데, 상사가 너무 놀라워 하시며 후다닥 나오셔서(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저 멘트를 한 게 성희롱 신고를 했던 한 번 뿐이어서 그랬나보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길래 제가 사고를 좀 쳐서요... 라고 했더니 더더욱 당황해 하셨다(업무 특성상 사고를 치면 큰일이 발생하는 업무다). 앗, 말을 잘못 했나보다 하고 서둘러 ㅇㅇ 부서와 조금 싸웠습니다, 하니까 그제서야 얼굴을 푸셨다. 사수에게 어제 얘기를 간략하게 들었다고 하셨다. (이... 비밀 없는 조막만한 부서!!)
근데 상사가 에이 그게 뭔 사고야. 하고 왜 거기서 ㅇㅇ님 괴롭혔어! 하시자마자 갑자기, 주륵 하고 애써 그쳤던 눈물(을 빙자한 콧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오씨 여기서 울면 안 되는데. 여기서 울면 회사원답지 못하는데 하다가 우리 상냥한 상사가 자꾸 달래주려 하시니까 결국 그냥 애처럼 아니 걔가요ㅠㅠㅠㅠ 막 이러는 거예요ㅠㅠㅠ 아니 진짜 제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ㅠㅠㅠㅠ 저 이 업무 안 맞는 것 같아요 으헝헝 하고 마구 털어놨다. 일단 상사께서는 찐 F셔서 맞지맞지 하고 내 편을 들어주시다가, 내가 좀 진정한 것 같으니까 저쪽 사정도 저 제재가 무서워서 저런 거라고 이해해 볼 수 있다며 설명해주셨다. 일리가 있긴 했다(자기가 물어봐 놓고 저러는 게 이상했지만). 그리고 애초에 저 변동이 매년 저 부서에서만 발생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으니 그 부분은 윗분들끼리 말해서 조율을 좀 해보겠다고 하셨다. 결국 실무자들끼리는 싸워도 해결할 수 없던 원천적 해결책이었다. 뭔가 엄청난 으른 같으셨다....ㅠ
한 시간 가량 면담을 진행한 끝에, 그놈의 '공식 메일'의 초안을 잡아 보냈고 조금 재수없게 끝까지 우기기는 했지만 어쨌든 한 발 물러난 답변도 받아 그런대로 사건이 마무리됐다. 그리고 그제서야 허기가 느껴지고 아침도 먹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아직도 몸만 큰게 아닐까 하고 가끔 생각했는데, 어제는 특히나 사고치고 어른들의 해결을 필요로 하는 애가 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든든했다. 후배가 없어서 그런가, 나이나 연차에 걸맞지 않게 자꾸 막내짓(?)을 하는 기분이 들고 이번에는 특히 더 그랬는데, 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내 힘으로 해결해 볼 수 있을까. 뭔가 좀 더 프로-페셔널 하고 믿음직스러운 어른이 되고 싶은데 참 쉽지가 않다. 아무튼 상사 덕에 한 번의 퇴사 욕구를 잠시 이겨냈다. 그치만 이런 일이 더 반복되지 않으면 좋겠다. 제발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일만 좀 잘 해주면 좋겠다...ㅠ 뒤끝이지만 참고로 제재를 제제라고 써 오신 것 참 없어 보였어요, ㅇㅇ님. 그리고 다음부터는 연락할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