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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야 Jun 03. 2022

입이 터졌다.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1.

 뱅크샐러드 유전자 검사에서 내게 남들보다 탁월하게 다른 점이 세 가지 나왔었다. 탁월하게 좋은 점이라고 쓸 수는 없는 게, 근력 운동능력 하위 4퍼센트, 유산소 운동능력 하위 10퍼센트였나 이 두 가지는 누가 봐도 나쁜 결과였고, 남은 한 가지는 포만감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라 좋은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푸드파이터가 될 게 아니라면 운동 효율도 나쁜데 많이 먹기만 하는 건 유전자 속부터 살 찔 예정이라고 말하는 기분이었다. 대학생 초반에 간신히 평균 몸무게가 되었던 게 기본값이 아니라 뼈를 깎는 결과였던가. 결과를 받고 유심히 보니, 남들이 배 터져 더 못 먹겠다고 할 때 식사를 같이 그만둬 보기는 하지만 사실 더 먹을 수 있는 것 같다. 혼자 밥을 먹으면 더 위험한 게, 배가 부를 때까지 회사의 공장밥을 끝까지 먹고 있기 때문에 혼밥을 권장한 코시국에 더 쪘나 싶기도 하다.


2.

 예전에는 사람들이 별로 쓰는 걸 못 봤었는데 나이들고 쓰는 걸 알게 된 단어 중에 '입이 터졌다'가 있다. 단어만 들었을 때는 '말문이 터지다', '방언이 터지다'처럼 말하기와 가까운 단어처럼 보였는데, 사람들이 주로 쓰는 용도는 식이와 가까운 단어더라. 주로 '봇물이 터지듯이 식욕을 절제하지 못 하고 많이 먹는다' 정도의 뉘앙스로 보이는데, 음. 사전에 딱히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내 주변에선 대충 '다이어트 해야 하는데 요새 입이 터져서-' 뭐 이런 느낌으로 쓰이는 것 같다. 무튼 나도 최근에는 도저히 굶기는 커녕 배가 안 고파도 자꾸 먹는 것이(왜 자꾸 치읓이 붙으려는지) 위가 어마어마하게 커졌나 싶기도 하고 그냥 먹는 것 자체에 중독이 되었나 싶기도 하다. 가끔 뱃가죽이 아플 정도로 먹기도 하는데, 어떤 의미로는 내 몸에게 참 가혹하다 싶다.


3.

 내 업무 특성상 일종의 민원(?)처럼 동시에 100명과 단기간에 계속 연락해야 하는데, 이게 지금 약 넉 달째 이어지다 보니 불만이 아주 많아졌다. 예를 들면, 전화를 끊고 옆에 있는 과장님에게 투덜댄다거나 이메일 질의를 보면서 궁시렁대는 식이다. 사실 나를 변호하자면 불만이 없을 수는 없지만, 점점 사용하는 단어가 험해지기도 하고 내 이메일이나 전화 내용을 모른 채 내 뒷담화를 들어야 하는 부서원에게는 내가 몹시 부정적으로만 보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부서에 새로 오신 분이 계신데, 그 분에게 부서 분위기나 업무 등등을 말씀드리면서 '사실 제가 성격이 나빠서요'라고 하는데 그 분께서 웃으면서 '그래 보여요'라고 해서 갑자기 아차 싶었다. 예전에 동기에게 '운동해야 하는데 누워 있어 나는 게으른 돼지야'라고 했다가 '응 돼지야'였나... 뭐 그런 동의하는 반응을 해서 상처받았다고 했더니 니가 한 말 그대로 한 거니 니 잘못이라고 한 말에 충격을 먹었던 적이 있는데, 내가 또 그때처럼 나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말했나 싶기도 하고. 실제로 요새는 속으로 주워삼킬만한 말도 필터링 없이 자꾸 튀어나와서 집에 가서 '괜히 말했다', '오늘도 너무 말을 많이 했다'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 또한 입이 터진 느낌이었다. 줄줄줄 새는 내 입. 많은 브런치 글들에서 직장생활에서는 말을 아끼는 게 일을 잘 하는 거라데. 나는... 음... 개선이 필요한 것 같다.


4.

 이번 주 성과. 한 달짜리 드디어 제출 완료, 한 달짜리 또 새로 하나 시작이지만 아무튼 하나는 완료. 피티도 두 번이나 감! 아직 헬스장은 운동화만 넣어뒀지만. 운전 연습도 했다. 하기 싫은 으른의 일을 꽤나 했다. 아, 수면시간은 아직도 확보하지 못 했다. 최근에 특히나 잠을 길게 못 잔다. 새벽에 두세 번씩 깨는 일이 허다하다. 깨서 시계를 보면 막 너댓시라 어설프게 잤다가 지각한 날도 있다(일년에 한두번 있던 일인데). 싫어하던 상사가 부서에 돌아올 수 있다는 거라거나, 과거의 힘든 일을 상기시키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거나 하는 스트레스 상황들이 겹치면서, 스스로 심신 건강을 고민하게 되더라. 다쳤던 어깨는 많이 나아지고 있는데, 치료가 끝나면 점심 시간에 상담도 받아봐야 할까 싶기도 하다. 요새는 진지하게 사람이 싫다.


5.

 어제는 부서 회식을 했다. 1차 끝나고 여직원들 데리고 튀었다. 취한 아저씨들이 2차 안 가는 점을 계속 몇 번씩 강조하는 게, 아무래도 못마땅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무시했다. 음, 이래서 내가 사회생활을 못하나 봐. 들어보니 젊은 직원들끼리는 와인바도 가고 저녁에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그러나 본데, 아무래도 부서원들과 술을 먹고 싶지는 않다. 예전 회사에서 허리에 손을 감던 아저씨라든가, 내 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아저씨라든가. 아니면 아내와의 성관계 얘기를 시시덕거리듯 말하던 지금은 다른 부서에 간 아저씨라든가. 술자리에서는 업무 중에는 느끼지 못했던 불필요한 관계가 쌓여간다. 홀로 사이다만 마시며 맨정신으로 있으면 그 안에서 나만 오히려 이상한 사람 같다. 그치만, 아무리 친해도, 음. 점심 맛있는 것 먹으러 가느니만 못하는 것 같다. 그런 것 치고는 상사는 어제 회식자리 가는 차 속에서 내가 꼼장어를 먹는다는 소식에 꼼장어 회식을 새로 만드시려는 것 같지만... 주인공을 나로 잡으면 도망가지 못해서, 신경써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불편하다. 기왕 갈 거라면 운동 안 가는 날이면 좋겠다.


6.

 사실 오늘 연차다. 학교에 와서 근처 카페에서 이 글을 쓰는데, 학교 다닐 때는 오히려 해보지 못했던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서 신기하다. 나는 뭐 그리 맨날 바쁘게 살았을까. 사실 밥 먹을 시간도 일부러 만들지 않아서 돈도 아끼고 살도 빼고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때 더 돌아다니고 친구들도 만나고 했으면 지금 사람을 덜 싫어했을까? 조금 더 여유로운 사람일 수 있었을까? 확실한 건 지금의 내가 2012년의 나에게 그 얘기를 했더라도 걔는 그 말을 안 듣고 똑같이 디스크에 걸리고 똑같이 울고 있었을 거다. 건강이라도 하자, 호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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