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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야 Feb 20. 2022

8. 단백질 보충 대작전, 그릭 요거트

서른 살, 밥은 해 먹고 살 수 있을까?

 먼 옛날 과학 시간에, 화합물과 혼합물의 차이를 배웠던 것 같다. 서로 다른 두 가지를 섞었는데 성질이 변하면 화합물, 변하지 않고 그냥 물리적으로만 섞여 있으면 혼합물이었던가? 검색해보니 화학적 특성을 유지하면 혼합물, 완전 다른 새 물질이 되면 화합물이라고 한다. 음, 생각했던 것이랑은 좀 다르군. 나는 불이나 오븐 같은 걸로 조리하거나 해서 바뀌는 것도 화합물이라 생각했는데, 이 얘기는 그러면 취소.


 아무튼, 원래 하고 싶었던 얘기는 뭔가 조리 과정을 거쳐야 요리를 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가스렌지에서 파스타를 만든다든지, 오븐에 빵을 데워서 뭘 얹어 먹는다든지. 밥에 반찬만 먹어도 일단 밥이라도 해야 하고, 하다 못해 제일 간단하게 먹는 (알러지가 나지 않는) 음식도 냉동식품을 에어프라이어나 전자렌지에 돌리는 정도인 나다. 물론 내가 집에서 밥을 먹는 게 일주일에 하루이틀 정도이지만, 그냥 끼니를 떼우는 것에 만족하던 게 뭔가 내 몸에게 제대로 차려주려고 하다 보니 이게 또 꽤나 일이 되는 것이다. 특히 재택근무 점심에는 예전처럼 컵라면 한 그릇이 간절하기도 했다.


 이 쯤의 내게 혜성처럼 등장한 메뉴는 그릭요거트였다. 아까 화합물 혼합물 얘기를 하고자 했던 사유가 요 그릭요거트는 그냥 다른 재료들이랑 섞어 놓고 먹기만 하면 되어서, 혼합물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련이 남지만 요 얘기는 그만하고. 식단을 꽤나 철저히 하는 운동쟁이 친구가, 그릭요거트를 알려준 것이다. 친구는 그릭에 단백질도 많고, 그래놀라랑 견과류 등을 넣어 먹으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으면서도 식단관리가 된다고 했다. 처음엔 여러 군데에서 사먹다가 가격이 생각보다 좀 된다며 만들어 먹는다고까지 했는데, 만들기까지 하다니. 그 정도로 맛이 있나? 예전에 동남아 여행을 다닐 때 플레인 요거트에 과일이랑 뮤즐리를 넣은 '요거트 뮤즐리'를 조식으로 종종 사먹긴 했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그런 요플레 같은 느낌보다는 리코타 치즈에 가까운 식감인 듯했다. 궁금했지만 친구와 거리가 멀어 자주 만나지 못했으므로 계속 이야기만 듣던 미지의 존재였다.


 그러던 작년 여름쯤, 동네에서 만난 다른 친구와 점심 메뉴를 고르다가, 배가 많이 고프지 않아 그릭요거트가 떠올랐다(왠지 건강식품은 배가 부르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기는 서울이 아니라서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약간 미심쩍긴 하지만 2주 전쯤 오픈한 가게가 만난 장소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정도면 걸을 수 있지, 하고 찾아가보니 아파트에 딸린 작은 상가의 지하층. 지하에... 요거트 카페라고? 일단 내려가서 유리문으로 구경해 본 가게는 그냥 냉장고가 많고, 식탁도 없는 뭔가 창고같은 부엌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있기에 여쭤보니 배달/포장 전문이라고. 메뉴판도 따로 없어서 그냥 배민 창을 사장님 폰으로 보여 주시면서 고르라고 하셨다.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포장을 해 가서 아파트 놀이터에서라도 먹어 보자, 하고 고르는데, 뭔가 요거트 양도 모르겠고 토핑도 모르겠어서 둘이 이정도면 되나..? 하고 되는 대로 고르다가 삼만 원이 넘게 나왔고, 컵라면만한 플라스틱 용기로 다섯 팩이 나왔다.

사장님도 넣다가 실소를 지으셨을 것 같은 사진. 과일이랑 시리얼을 따로 담다가 또 안 들어가서 새 용기를 또 꺼내고... 초보 사장님과 초보 손님의 환장 콜라보!

 다시 봐도 웃음이 터져나오는 사진. 찾다 갤러리에서 추억 여행에 빠지게 되었어서 친구한테 요청해서 받았다. 배가 고프지 않아서 사러 갔다던 말이 무색하게도, 둘 모두 배터지게 먹고도 두 팩이 남아서 야무지게 집까지 챙겨 갔다. 어쨌든 신기한(?) 메뉴가 배달이 되는 걸 알았으니 그 다음부터는 언니랑 열심히 시켜 먹었다. 다른 배달 음식보다는 몸에게 좋은 일을 하는 기분이기도 했고, 집에 언니가 사다 놓은 시리얼이 6봉 가까이 있어서 소진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가끔은 컬리에서 완제품을 사먹기도 했다.

그래놀라, 견과류, 남는 과일이 총 동원된 건강식. 뻑뻑하면 꿀 뿌리면 더 맛있다.

 그 쯤, 동네 산책을 나갔다가 도보 20분 거리에 아담한 그릭요거트집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내 또래의(아니 더 어리실 지도...) 여자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것 같았는데, 가게는 작지만 아기자기 예쁘게 꾸며 두셨고 수제 그래놀라도 파는 곳이었다. 지역화폐도 사용이 가능했고, 무엇보다, 플라스틱 용기를 가져 오면 300원 할인을 해 주신다고 해서, 염두에 두고 산책삼아 한 번씩 다녀와야 겠다고 생각했다.

동네에서 플레인 요거트를 사며 같이 산 플레이버 요거트. 아무래도 딸기 시즌은 지나치기 어렵다. 정말 맛있었다!


 생각을 실천을 옮기는 데에는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집에서는 도보 20분이지만, 퇴근 후 집까지 30분을 더하고, 또 20분을 걸어 나가면 거진 1시간을 잡아야 하는데 7시에 닫는 가게였던 것이다. 결국 지역사랑상품권 2만원을 4번 결제하면 환급을 해준다는 공지를 본 어느 부지런하던 저녁, 빠퇴를 하고 집에 가서 용기와 자전거를 챙겨서 후다닥 닫기 5분 전에 성공적으로 '용기 내서 용기 내기!'를 성공했다. 집 와서 보니 300원 할인이 안 되어서 디엠으로 연락드려 환급을 받았다는, 퇴근 직후 직장인과 퇴근 직전 직장인의 웃픈 스토리는 덤. 사실 할인된 가격보다 간 김에 언니 몫까지 사는 바람에 쓴 돈은 더 많긴 했지만, 그래도 쓰레기를 덜 만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용기 내서 용기 째 받아 온 요거트볼(왼쪽)과, 사온 그릭요거트로 직접 만든 야매 요거트볼(오른쪽) 이정도면 근사한 요리 아닌가!

 근종이 생긴 뒤로는 유제품을 줄이라 해서 또 한동안 먹지 않았지만, 유제품을 안 먹는다는 것 치고는 바쁘다고 빵, 과자 등을 챙겨먹는 나를 보게 되어서 차라리 유제품이라도 건강한 게 낫지 않나 싶어 재택 비상용으로 그릭을 다시 찾게 됐다. 일단 그릭을 사다 두면 맛있게 먹기 위해 과일을 모아 오고, 먹기 좋게 손질하는 등 나름대로 몸을 쓰는 게 요리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차피 근종은 평생 가져갈 거니까, 괜히 스트레스 받다가 터지듯이 이상한 걸 먹는게 더 별로지 않을까. 아, 알레르기는, 발효제품에 알러지가 있긴 하지만 이상하게 그릭요거트는 생각보다 반응이 심하지 않아서 먹기 좋다. 이 얘기를 했더니 언니가 그럼 유산균이 없어진 것 아냐? 라고 했지만 음. 그 부분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인체실험 결과가 그랬다. 찾아 보니, 유산균 있는 것 같은데... 빠진 유청 대부분은 유당이고, 수용성 단백질과 수용성 비타민 등이 같이 걸러진다고 한다. 그냥 과하게 발효를 시키지 않은 요거트로 주로 그릭요거트를 해서 그런 것 같다.

요리라고 주장하게 된 근거! 회사에 나온 크라상을 오븐에 구워 그릭요거트와 청포도, 꿀을 뿌려 채웠다. 맛은 있는데 확실히 빵 때문에 먹으면서 점점 목이 아파왔다.

 그 쯤에 (요리 잘하는)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우리집 골치덩이 시리얼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다른건 그릭요거트로 어찌어찌 먹겠는데, 오트밀이 많이 섞여 있고 거의 코코아 가루에 가까운 '믹스업'이라는 시리얼을 영 처치하지 못하겠다고. 막 나온 신제품이 1+1이라고 언니가 두 봉지나 사다 놓고는 방치하고 있는 놈이었다. 친구는 '오나오(오버나이트 오트밀)'이라는 메뉴를 소개해 줬다. 보통은 오트밀이라는 애가 좀 종이장 같은 질감이고 하니, 불려서 먹는 게 먹기 좋아서 자기 전에 미리 오트밀과 요거트를 층층이 쌓아 불려 놓고 다음 날 먹는 메뉴라고 한다. 초코라고 하니 바나나랑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다는 것이다.

애증의 믹스-업. 언제 다 먹지. 저 내부 비주얼과 사진의 갭이 너무 사기다.

 그래서 도전! 그릭요거트가 너무 꾸덕해서 혹시 녹지 않을까봐 첫 층은 아몬드브리즈로 하고, 믹스업-아몬드브리즈-믹스업-그릭요거트-견과류로 얹어 놓고 자고 일어났다. 결과는, 음. 윗 부분은 괜찮았는데 아래로 갈 수록 너어어무 달았다. 단 걸 그렇게 잘 먹는 편이 아닌데... 일단 믹스업이 너무 많이 들어갔던 것 같다. 또, 세로로 긴 병에다 했더니 윗 부분은 그릭요거트랑 견과류가 있어서 괜찮았지만 내려갈수록 아몬드브리즈에 갇힌, 녹지 않고 그냥 갇힌 애들이 나오면서 그냥 초코 프로틴 맛이 났다ㅜㅜ

오나오 첫 시도. 병을 꽉 채웠다.

 며칠 뒤 설욕전으로 바나나도 가져와서 재도전을 했다. 아몬드브리즈 대신 근종에겐 미안하지만 잘 녹으라고 우유도 좀 써봤다. 나름 메모했던 레시피는 아래와 같다.


< 아래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리기 >


1. 하루견과 한 봉 (과자 안 들어간 버전)

2. 믹스업 두 숟갈(큰 숟가락)

3. 우유 70ml 정도 넣고 조금 섞기

4. 눌러 줄 요거트 두 숟갈

5. 로즈바나나 한 개 잘라서 넣기

6. 다시 하루견과 한 봉

7. 믹스업 한 숟갈

8. 로즈바나나 하나 추가!

9. 하루 기다리고 먹을 때는 그래놀라 추가해서 먹기


 음 이 레시피로는 괜찮았다. 확실히 초코와 바나나 조합은 잘 어울렸고, 사실상 믹스업도 두 숟갈밖에 없어서 비주얼은 좀.. 개밥 같지만 괜찮게 잘 먹을 수 있었다. 유리병에 넣었더니 회사에 도시락 삼아 가져갈 수도 있었다(야근하다 먹었다). 그치만 우유가 들어가니 생각보다 아래가 코코아인 그릭요거트볼처럼 보여서, 아예 다음에 한다면 플레인요거트에 하면 되겠다 싶었다. 알러지가 나지만 좀 도전해볼까...?

용케 집에 있던 전 재료

 오나오 삼도전을 위해 회사에서 가끔 후식으로 나오는 플레인 요거트를 챙겨왔다. 집에서 먹을 거니까 이번엔 그냥 편하게 락앤락에 해야지, 하고 믹스업을 푸다가, 최근에 만났을 때 같이 컬리에서 시킨 그릭요거트를 먹고는 반해서 사먹던 친구가 맛은 있는데 비싸다고 부담이라고 해서 찾아 줬던 '커피필터 그릭 요거트' 레시피가 떠올랐다. 마침 우리집은 장비병 대마왕인 언니 덕에 드립용 장비들이 다 있네? 믹스업을 다시 봉다리에 넣고 나서(아무래도 일주일에 세 번은 너무 많잖아) 신나게 실행해봤다. 이것도 오나오처럼 밤에 해놓고 나면 아침에 짜잔, 되어 있겠지?


 하지만 도대체 뭘 잘못했는지, 유청이 서너 스푼쯤 내려오긴 했는데, 비주얼이 영 아니다. 반 정도 내려올 거라고 했는데... 검색해보니 나랑 비슷한 사례가.

 https://blog.naver.com/kke1849/222424969095


나도 이 분과 비슷한 상태였다. 흠, 무게가 부족한 걸까? 만들던 친구는 막 무거운걸 놓기도 한다던데, 이건 면보가 아니라 커피필터라 닫히지 않아서 그것도 좀 어렵고. 누가 실온에 두면 유청이 좀 더 분리된다는 글도 있고. 냉장고에서 몇 번 꺼내길 반복, 다른 글에서는 커피 필터에서는 더 오래 걸린대서 다시 냉장고에 넣고 기다렸는데, 하루 더 기다리니 조금 더 진도가 나간...건지 아니면 마른 건지. 그냥 뚜껑 덮고 본가 가서 주말을 나 보기로 했다. 발행일에는 알 수 없는 결과물이다.


 커피 필터 그릭 요거트를 냉장고에 넣으면서 언니한테 나는 요리 실력이 필요 없이 시간이 다 해주는 게 좋아! 라고 말하다가 양파스프 얘기가 나왔다. 이건 정말 실력 필요 없이 한 시간 동안 젓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데, 음, 불은 그래도 무서워. 탈 것 같아. 라고 하니 젓기만 하면 타지 않는다는 언니. 그게 싫은 거면 너는 요리 실력이 아니라 그냥 귀찮은게 싫은거야, 라고 하더라. 흥 논리에서 졌지만 아무튼 내가 말하는 요리 실력은 그런 느낌이 아니라구. 불 무섭다구.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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