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를 다니던 언니에게 왜 그 돈 들여 험지까지 다니냐고 하던 고등학생 꼬맹이는, 발 다친 보험료를 들고 동남아 일주를 하는 게으른 휴학생이 되었었다. 물론 출발의 사유는 발이 곪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지만(다쳐서 운동화를 신으면 곪을 수 있댔는데 가을이 오고 있었다..!), 그것을 제하고라도 누군가 여행의 목적을 물었다면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먹으러 왔지요!
제목과 달리 슬프게도 첫 한 달 가량은 사실 거의 빵, 면요리만 먹었다. 라오스-태국 북부쪽 쌀국수(베트남과 달리 약간 고기된장? 같은게 들어간다)집들을 많이 갔고(엄청 맛있다), 과일들도 꾸준히 사먹었고, 특히 라오스는 프랑스 식민지라 빵들이 정말 맛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여러 가지 메뉴가 있는 식당에서 메뉴를 고르면 무조건 팟타이(영어로는 Thai style stir-fried noodle 정도였던 것 같다. 팟이 볶다, 타이가 태국(태국식) 이어서)를 먹었다. 나름의... 나름의 중대한 사명이 있었는데, 태국 요리 중 한국에서 유일하게 맛봤던 팟타이를 너무 좋아해서, 최고의 팟타이를 찾겠다!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다. 아주 헛된 목표였다. 시장 팟타이는 시장 팟타이 나름의 맛, 가정집 팟타이는 가정집 손맛, 가게 팟타이는 또 고급진 그런 맛이 있었기 때문. 마치 떡볶이 맛집을 찾겠어!라고 했지만 즉석 떡볶이와 포장마차 떡볶이, 할머니 떡볶이가 다 다른 그런 느낌이랄까...
그런 내가 팟타이가 아닌 다른 메뉴를 고르게 된 것은 우연에서였다. 라오스에서 국경을 넘어 태국 북부, 치앙마이까지 갔을 때 들른 어느 식당에서, 동행이었던 언니가 그린커리를 시켰는데(나는 팟타이..ㅎㅎ), 도무지 입에 맞지 않아 못 먹겠다고 곤란해 했던 것이다. 나는 어지간한 음식은 다 입에 맞았어서 그럼 바꿔먹자, 하고 한 입. 아니 이건 천상의 맛인가.....? 달콤함 짭잘함 매콤함이 절묘하게 섞여 만든 이것은 존맛! 나, 이런 걸 두고 한달간 팟타이만 먹은거야?
후회를 거듭하며(다시 생각해도 여행의 1/3 가량을 한 메뉴만 먹은 게 후회가 된다) 커리로 폴인럽, 그 뒤로 식당에 가면 항상 다양한 커리를 시켜보곤 했다. 그린 커리, 레드 커리, 옐로우 커리, 페낭 커리, 마사만 커리. 특히 라오스 남부에서 갔던 섬 숙소의 마사만 커리는 너무 맛있어서, 그 섬을 뜰 때까지 거의 매일 사먹었던 것 같다. 그렇게 팟타이만 사먹을 때까지 몸무게를 유지하다가(태국은 1바트만 내면 편의점 체중계를 써 볼 수 있었다), 4키로를 찌게 만든 애증.. 아니 애정의 메뉴를 만난 것이다. 증오라고 쓰기엔 너무 사랑하는 걸?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원래 카레를 좋아했다. 고3 때는 소화가 잘 안된다고 시험기간이면 항상 찰밥에 카레만 먹었고, 동남아를 가기 전 봉사활동으로 간 네팔에서 삼시세끼 커리를 먹으면서 행복해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태국에서 아주 황홀한 삼시네세끼....를 찍다가, 처음 한국 돌아왔을 땐 아휴, 학생 신분으로 정말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파는 음식들에 손을 떨 수밖에 없었다(이천원짜리 커리가 단돈 만오천원! 이라는 느낌?). 근데 심지어 그 가격주고 사먹은 메뉴가 푸드코트 맛 수준일 때의 그 허탈함이란... 당시 나는 페이스북에 있는 맛집 추천 이런 게시글들을 열심히 캡처하곤 했는데, 그 중 서울에 있는 태국 음식점들은 정말 열심히 하나하나 다니면서 먹곤 했다(지금은 정말 많아졌고, 퀄리티들도 많이 높아졌다. 가격도 다양해졌다).
취직을 하여 돈을 벌게 되고, 여전히 태국 음식에 목말라하다 다시 간 태국에서는, 요리를 좋아하는 친구와 각 잡고 쿠킹클래스부터 들었다. '19.10월 기준, 뭔가 클락 비슷한 그런 어플로 인당 삼만원대 정도에 예약했던 것 같다. SOMPONG THAI COOKING SCHOOL 이었다. 오 오늘도 빌드업이 너무 기네. 아무튼 영어가 유창하셔서(친구가 가끔 통역해줬다) 너댓가지 요리를 만들었는데, 설명도 자세했고, 무엇보다 쿡북을 마지막에 주셔서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었다. 내 글에 등장하는 쏨땀, 커리 등은 다 요 레시피를 바탕으로 한 요리들이다. 책도 작아서 전자렌지 위에 두고 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요리 못하는 사람 짤... 근데 국간장이랑 간장이 뭐가 다른지 나도 모르긴 한다. 집에 없어서 다행!
스아실 나도 좀 미니멀리즘이고 싶지만 요알못에겐 선택권이 별로 없기도 했고, 자꾸 주변에서 요리 초보 짤을 보내와서 결국 재료들을 다 살 수 밖에 없더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집에 있던 피시 소스와 라임즙을 기본으로, 저번에 쏨땀할 때 샀던 팜슈가만 있으면 사실 어지간하면 태국 냄새 나는 간이 된다. 거기에 이삼천원이면 살 수 있는 커리 페이스트와, 코코넛 밀크 캔(가끔 손잡이 없는 게 있으니 조심!) 정도만 있으면 일단 끝. 토핑(?)이야 뭐 집에 있는 걸 넣으면 되지 뭐... 요새는 큰 마트 가면 코코넛밀크까지는 팔고, 가끔 수입용품 코너에 커리 페이스트를 팔기도 한다. 쉽게는 아시안마트 이런 네이버스토어에서 사면 간단하게 다 구팔 수 있다. 레시피도 알려준다!
<그린커리 + 치킨, 깽키우완 까이>
저번에 그린커리 파스타를 만들기 전 먼저 했던 그린커리. 회사표 재료인 닭가슴살 소시지와 삶은 계란, 감자릉 대충 숭숭 넣었다. 참고한 레시피는 오른쪽.
그린커리는 보통 까이, 닭고기로 먹는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다른 조합도 선택은 가능하지만 보통 그렇다. 그지만 아직 생고기 만질 자신 없는 요리 초보는 닭가슴살 소시지를 가위로 숭숭, 없는 향신료(칼리프 라임 잎, 스위트 바질 잎)는 과감히 생략했다. 바질도 집에 있으면 편할 텐데, 이게 단내가 나서인지 벌레가 정말 잘 꼬여서 포기했다. 올해는 언니랑 한번 고민해보긴 해야겠다. 집에 라임나무는 있는데, 요 잎이 칼리프 라임 잎이랑은 다를 것 같아서(수업때 칼리프 라임은 못 먹는 애라고 한 것 같다. 우리 라임이는 먹으니까!) 패스. 아시안마트에 말린거 팔긴 하던데... 다음엔 좀 살까보다. 가지는 없어서 못 넣었는데, 원래 태국에선 커리에 가지는 국물을 더 깊게 만든다고 필수긴 하다(국물용은 작고 동그란 가지를 쓴다). 요 그린커리는 비주얼은 별로지만 맛이 꽤 괜찮았고, 남은 페이스트는 저번에 본 두부면으로 소진했다.
<레드커리 + 치킨, 깽 펫 까이>
다음 도전은 회사에 급작스러운 확진자 발생으로 집에 뭐가 없는데 재택근무를 하게 되어서, 비상용으로 있던 레드커리를 뜯게 되었다. 유통기한이 살짝 지난 닭가슴살을 소진하기 위해 첫 커리는 레드 치킨커리였고, 고구마를 넣었다. 이번에도 없는 재료는 동일. 코코넛밀크 캔을 열었더니 2인분이라, 락앤락에 덜어내고 나니 국물이 많아서 양이 좀 적게 된 것 같다. 그치만 코코넛 크림-밀크를 계량하기가 좀 귀찮은 편이라 대충!
<레드커리 + 파인애플, 깽꽈쌉빠랍>
오 이건 이름.. 읽기 어렵다. 보통 커리 이름은 깽끼우완이랑 깽펫 정도만 외웠어서, 어색하다. 쌉파랍이 파인애플일까? 파인애플 볶음밥도 약간 저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재료가 비슷한 듯 다르다. 아점을 챙겨먹고 검사가 음성이 떠서 다시 출근했고, 마침 파인애플이 회사에 나오길래 테이크아웃을 해 왔다. 오는 길에 쌀도 사 왔다. 냉동실에 굴러다니던 새우까지 대충 해서 도전! 백신을 맞아서, 든든하게 챙겨 먹겠다고 했다. 사실 레드커리 페이스트가 4인분인데, 필기에 뜯으면 일주일 이내로 먹으라고 되어 있어서 일주일 내 2번을 더 먹어야 했다ㅋㅋㅋㅋ
찰현미를 사와서 밥까지 나름 정갈하게. 오 나 무려 필기도 했었네... 수업 때 만든 커리였나보다.
<레드 커리 볶음밥>
몇 달 간의 자취요리 대장정의 꽤나 그럴 듯한 결과물
이건 사실 레시피북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봤다. 구글에서 "레드커리 볶음밥'을 치니까 나온 아시안마트 레시피였다. 레드커리를 만들 때 그린빈을 넣다가 좀 많이 엎었는데, 이미 양념이 묻어서 그냥 한 번에 만들고 이걸 해결하기 위해 볶음밥을 해야 했다. 대충 레시피 중 집에 있는 양파, 새우, 닭가슴살을 넣고, 간만에 계란후라이도 해서 넣었다. 피망은 우리집에 절대 없을 예정이라 넣지 못했다. 자취요리 컬렉션들 중에 제일 뭔가 요리스러운 느낌이었다! 계란후라이는 간만에 했더니 또 깨져서... 다시 연습을 좀 더 해야겠지만, 나름 스스로를 잘 먹이면서 사는 것 같아서 어깨가 조금 으쓱하다. 나트륨은 모르겠고 기분은 일단 좀 건강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