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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야 Feb 22. 2022

9. 밥... 아니 쌀이 떨어졌다.

서른 살, 밥은 해 먹고 살 수 있을까?

 내 자취 인생에서 쌀이 등장한 건 작년 말쯤. 그 전까지 집에서 밥이라 하면 햇반을 의미했다. 자취 초반, 할인한다고 햇반을 한 상자 샀다가 유통기한을 넘기기까지 해봤을 정도로 집에서 밥 자체를 잘 먹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 공기에 천오백원 가량이, 저렴하진 않긴 해도 자주 먹는 것도 아닌데... 하고 그냥 주기적으로 사는 생필품 정도로 생각했다. 건강을 생각해서 나름 발아현미밥이나 흑미밥 같은 잡곡밥 위주로 샀었고, 대충 선반에 쌓아 놓은 수위가 낮아졌다 싶으면 한번씩 간단하게 인터넷으로 시키곤 했다.


 근종 이 친구가 환경호르몬을 만나면 커진다는 소리를 만나기 전까진 그랬다. 밥통을 들였고, 엄마가 뭔가 텀블러 하나 만큼의 쌀을 주셨었다. 밖에서 말고 집에서 백미를 먹은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고(본가는 잡곡밥을 먹는다), 맛있었다! 다 좋은데, 그게 벌써... 두어달이 지났고. 쌀이 떨어졌다. 이제 1인분이 얼만큼인지 좀 알 것 같게 되었는데, 아무튼 그 1인분도 안 되는 한 세 숟갈 정도의 쌀만 남았다.


 어... 쌀을 사야지! 근데 쌀은 얼마지? 잡곡밥은 따로 파나? 엄마한테 물어볼까 하다가 나는 믓찐 서른이. 혼자 할 수 있지. 를 외치며 일단 마트를 갔다. 아. 일단 여기부터 실패였다. 우리집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는 트레이더스거든. 가장 작은 쌀이... 4kg이었다. 아 물론, 이상한(?) 쌀은 1kg짜리가 있었다. 정월대보름 정도에 갔더니 오곡밥용으로 모아둔 걸 팔더라. 그치만 도저히 내 돈 내고 콩...이 들어간 밥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심지어 저 1kg이랑 4kg이 같은 가격이었다!


 그리고 종류가 너무 많았다. 이름 모를 특수기능 쌀들(노란 무슨 쌀, 곤약쌀, 카무트? 뭐 이런 먹어본 적 없는 친구들도 보였다)은 물론이고, 백미 찹쌀 현미 찰현미 흑비 찰흑미 보리 등등.... 쌀이 무슨 이렇게 종류가 많지! 뭘 사야하는 지 잘 모르겠다. 얼마 되지 않는 코너를 빙빙 돌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4키로를 슬쩍 들어봤다. 음. 집까지 15-20분을 걸어서 갈 수 있는가? 아니요. 지어 한파라 휴대폰 꺼내서 보고 오는 것만도 너무 추웠다. 음. 포기!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 서운한 발걸음에 간식을 하나 집어들어서 불필요한 지출까지. 여러모로 아쉬운 나들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당장 먹을 쌀이 해결되지 않았고, 나는 부스터샷을 갓 맞아 다음 날 휴가니까 밥을 책임져야 한다! 아파 오는 팔과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집 가는 길을 살짝 틀어 중형마트를 향했다. 오. 백미는 큰거만 팔지만 현미는 800g을 판다! 그치만 2020년 도정....은 잘은 모르겠지마누뭔가 너무 옛날 같고. 잡곡들 중 가장 도정일자가 최근(작년 12월)인 찰현미를 집어 왔다. 쌀을 사다니. 어른 같다. 잠시 집에 쌀이 떨어져서 옆집에 쌀을 꾸러 가던 옛날 사람의 기분을 느끼며, 돈이 있어서 다행이라며 결제해 왔다.

어딘가 패키지는 트레이더스보다 멋이 덜 나던 동네 마트 쌀. 지퍼백이 있어서 편할 줄 알았는데 자꾸 저 턱에서 걸려서 이상한 각도로 튀어나간다. 결국 다른 병으로 옮겼다.

 자 그럼 다시 밥을 해야지. 미밥은 기존에 엄마가 줬던 백미랑 다르게(위키에서 열심히 밥 짓는 법을 보고 성공했었다. 위키 유능한 녀석), 20분이 아니라 최소 6시간을 불려야 한다고 한다. 일단 블로그들 중론은 어쨌든 저녁에 미리 불리고 다음 날 취사버튼 누르기. 오케이 접수. 마침 그 타이밍에 신 맞은 딸 걱정에 전화 온 어머니가 잡곡으로 취사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셨다. 아하 잡곡 오케이.


 대학 때부터 자취를 했다던 친구가 몇 년간 방치하는 중이라며 본인이 필요할 때까지 써봐도 된다고(가격을 주고 싶은데 한 번 거절당해서 여러 번 말하기 어려웠다. 다음에 맛난 거 사줘야제) 줬던 소형 밥솥은 생각보다 많은 기능이 있었고, 나는 현미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사실 어머니가 알려주시지 않았거나 기능이 없었어도 그냥 취사버튼을 누르긴 했겠지만. 잡곡밥은 여러 가지가 섞여야만 잡곡을 누르는 줄 알았었기 때문이다.


 현미밥 만드는 법, 불리는 법을 검색할 때 간과했던 문제가 어느 날 닥쳤다. 코로나가 점점 심해지고 피티쌤까지 확진이 되셔서, 다행히 나는 백신을 맞느라 전 주 운동을 가지 않아 괜찮았지만 그 주 운동이 갑자기 펑크가 나 집에 오게 됐다. 뭐라도 사 올 것을... 그냥 집에 쌀이 있으니 밥 챙겨먹으면 되겠지 했는데, 아. 현미밥. 아. 8시간... 왜 검색할 때 '불리지 않아도 되는 현미' 따위의 광고가 있었는지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갑작스러운 결정으로는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미리 불리지 않았기 때문에! 덕분에 그냥 또 건강하지 않은 밥으로만 떼우게 된 저녁에, 바로 다시 불리지 않아도 되는 쌀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실패했다. 자주 가던 쇼핑몰에 포인트가 만 점이 넘었고 다음 주면 만료라 그걸로 사고 싶었는데, 만원으로 살 수 있는 불리지 않아도 되는 쌀은 다 CJ택배라 오지 않았다. 결제하자마자 취소, 결제하자마자 취소. 반복되니 화가 나서 그냥 일반 현미를 사 버렸다. 비상용 쌀은... 비상용이니까 주말에 본가 가서 조금만 훔쳐 와야지.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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