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결혼은 현실, 2살 연하 남편과 치열하게 맞춘

30년의 관성을 멈춘 자리: 엑셀이 가르쳐주지 못한 것

by 그저 나


아무리 애틋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결혼은 결국 현실이었다.

전세 사기보이스피싱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넘을 땐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완벽한 ‘전우’였다.


하지만 파도가 잦아든 평화로운 거실에서,

우리는 정작 발가락 사이를 찌르는 모래알 같은

서로의 생활 습관 때문에 무너지고 있었다.


나에게 집안일은 10년 자취 인생이 남긴

‘생존 루틴’이었지만,

30년 평생을 본가에서 부모님의 돌봄 아래

자란 남편에게 그것은 ‘누군가 대신해 주는 일’

혹은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었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오면,

나만 바삐 움직이는 풍경이 반복됐다.

배려 차원에서 구두로 업무를 나누어 보았지만,

지켜지지 않는 약속은 서운함만 키울 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가사 업무 분담 엑셀 시트’**를 만들었다.

하지만 엑셀은 만능이 아니었다.

시트를 채우면 해결될 줄 알았건만,

나는 어느새 남편의 뒤를 쫓아다니며

완료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 반장’이 되어 있었다.


“설거지했어?”, “빨래 널었어?” 묻는 것조차

에너지가 소모되는 인지적 노동이었다.

사랑을 하고 싶은 내가 왜 신혼집에서

남편 ‘가사 팀장’으로 재취업해야 하는지,

자괴감이 밀려왔다.


갈등은 어느 주말, 급하게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폭발했다.

서로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나는 "오늘은 집에 안 들어갈 거야"라고 선언했고,

그 길로 결혼 후 처음으로 친구 집으로 향했다.


“사과할 때까지 들어가지 않을 거야”는 결심과 함께

5일간의 외박이 시작됐다.


5일 뒤, 다시 마주한 남편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안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음을

그 모든 사소한 노동에 담긴

나의 헌신을 직접 근육으로 느낀 것이다.


“내가 해보니까 너무 힘들더라.

내 회사 근처로 이사 와서

누나 출퇴근이 멀어져서 힘들었을 텐데

매일 군소리 없이 이걸 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이제야 알았어.”


그의 손에는 투박한 편지 한 통

내가 요구한 것들이 빠짐없이 들려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말로는 절대 안 바뀐다는 걸.


“이번엔 정말 달라져야 해.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해.”


남편은 내 요구를 하나하나 받아들이며

진심으로 바뀌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일주일 뒤,

이제 우리 집 거실에서 엑셀 시트는 더 이상

켜지지 않는다.

내가 시키지 않아도 청소기가 돌아가고,

주말엔 컴퓨터 게임 대신 나를 위한 시간을

먼저 제안한다.


30년의 관성을 꺾은 것은 서로의 빈자리가 주는

차가운 교훈이었다.

비워진 통장보다 더 크게 채워진

우리의 온도를 확인하며,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내려앉은 고요.

그 평화 속에서야 비로소, 그동안 애써 외면해 왔던

내 몸의 비명들이 하나둘씩 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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