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다시 일으킨 손길
사람마다 인생의 계절이 다르다지만,
나의 스물여덟은 유독 시린 겨울이었다.
평생 성실하고 곧은 모습으로
자식들의 거울이 되어주셨던 나의 아버지.
나는 연인이었던 그 남자에게서
아버지와 같은 결을 보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평범했던 10월의 마지막 날,
그 믿음은 비명이 되어 돌아왔다.
그가 샤워를 하러 들어간 사이,
우연히 열어본 그의 애플워치 속 녹음기.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은
내 귀를 의심케 했다.
내가 알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의 추악한 진실들.
처음엔 누군가에게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일상적인 물소리와 대조적으로,
녹음기 속 대화는 비현실적일 만큼 선명했다.
소리를 내면 그가 나올까 봐,
나는 입을 틀어막고 숨죽여 울었다.
심장이 툭,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기분.
그 순간 나의 20대 시계는 거짓말처럼 멈춰버렸다.
상처를 추스를 새도 없이 삶은 나를 더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보이스피싱이라는 뜻밖의 재난.
하루아침에 내 이름 앞으로 1,500만 원이라는
빚이 생겼다.
치과 위생사로 일하며 받는 월급 200만 원 중 150만 원이 원금과 이자로 사라지는 현실.
부모님께는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나는 매일 눈물을 삼키며 ‘괜찮은 척'하는 가면을 쓰고,
홀로 그 숫자의 무게를 견뎌야 했다.
그렇게 어두운 터널을 지나던 29살의 어느 날,
뜻밖의 손길이 내게 닿았다.
카드 빚과 결혼 자금 사이에서 연애는 사치였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지던 시절.
억지로 나간 지인의 생일 파티에서 그를 만났다.
"저는 지금 누굴 만날 상황이 아니에요. “
차갑게 밀어내는 나를 향해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당시 27살, 매일 새벽 6시 40분에 출근하는 성실한 청년이었던 그.
그 고단한 뒷모습이 나와 닮아있어서였을까.
그는 나의 사정을 다 알지 못하면서도,
엉망진창이 된 내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나보다 어린 그가 건넨 손은 생각보다 크고 단단했다.
그 손을 잡는 순간,
멈춰있던 나의 시계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그날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심장이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그날의 밤이 있었기에, 내가 잡은 이 손이
얼마나 따뜻한지 알게 된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