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글쓰기를 좋아했던 난 서점을 모르고 살았다. 내가 자란 시골은 서점은커녕 분리된 문구점조차도 없었다.
집에 책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독서는 학교 도서관에서 읽는 것이 전부였다. 독서를 많이 할 수 없었던 이유라면 이유가 되겠다. 그런데도 독후감 경시대회는 해마다 참가를 해서 종종 상을 받았다.
난 그림보다도 글짓기 상이 많았다.
2년 선배 중에 글짓기를 잘해서 늘 상을 받는 언니가 있었다. 난 그 언니처럼 되고 싶었다. 참 가난한 언니 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시골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엄마와 단둘이 살았던 선배 언니, 글이 가슴을 울려서 큰 작가가 될 것이라고 암암리 모두가 생각했다.
그 언니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할까
새삼 그 시절이 아련하게 가슴을 후비고 들어온다.
난 특별활동 시간에 글짓기 반을 선택했고 교내 글짓기 상을 휩쓸었던 것 같다.
시골학교였으니 조금만 노력하면 받을 수 있었던 상, 농사짓는 집 아이들보다 조금 덜 가난 했고 일을 돕지 않아도 되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랬던 내가 돌연 글짓기 쪽이 아닌 미술을 전공하게 된 배경에는 한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단 한 번도 배우지 않은 그림이 선생님 손에 들려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미술시간이었다.
한 학생이 모델로 앉아있고 우린 모델을 상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데생을 먼저 하고 수채화 물감으로 색칠하는 인물화 그리기 시간이었다.
모두 완성했을 때 선생님은 찬찬히 학생들 그림을 살펴 보시더니 내 그림을 들고 교단으로 가셨다. 당시 연세가 있으셨던 선생님은 미술학원을 겸하고 있었는데 그곳 미술학원을 다니는 학생이 우리 반에도 두 명이나 있었다.
그럼에도 전혀 존재감 없는 내 그림을 선택하신 거다.
모든 학생들이 선생님을 주시하고 그림을 바라봤다.
"이 그림은 나보다도 더 잘 그렸다. 데생이 입체감이 좋고 색감도 좋아 표정이 살아있어.
열심히 하면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겠다"
미술학원 근처도 안 갔던 내가 선생님보다도 더 잘 그린다는 말에 가슴이 두근 거렸다.
이보다 더 큰 칭찬이 있을까
'방황과 방황의 연속이었던 사춘기에 종지부를 찍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리라 다짐했다. 난 화가가 될 것이다. '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내 미래의 희망을 바꿔버렸다.
딱히 무얼 할 건지도 불분명했던 때다.
사춘기를 혹독하게 보냈던 난 매사 부정적이었고 삶과 죽음, 내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무거운 명제로 매 시간을 앓으며 살고 있었다.
전혜린의 글에 탐닉했고 자살했던 그녀의 생이 안개 낀 독일의 배경과 맛물려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삶의 주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도 야망이 없는 것도 가난한 환경을 탓했다. 내 앞길에 등불이 되지 못한 배경이 무슨 소용일까 난 스스로 파멸하던지 오뚝이가 되던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생각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은 생각이 단순해서 순종하는 앵무새여서 라며 폄하했다.
내겐 왜 등대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걸까
애초에 선택받지 못한 생이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날 말이고 그저 위로에 불과한 말이라고
요즘엔 개천에서 똥밖에 안 나온다고......
내 앞길을 이끌어주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내 인생은 좀 더 윤택해졌을지도 모른다고
한없는 자괴와 부정적 사고 더불어 염세적인 사상이 내 머릿속을 짓누르며 좀먹고 있었다.
건강하지 못한 육체가 정신까지 지배했던 시절
난 늘 아팠다 특히 두통이 심해서 아스피린을 수시로 달고 살았다.
'무의미한 삶에 희망을 지피다니
그래 난 기필코 세계적인 화가가 될 것이다.'
'BOYS, BE AMBITIOUS'
"젊은이여, 포부를 가져라.” 미국의 과학자이고 교육자인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가 80여 년 전, 일본에서 남긴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은 오랜 세월 동안 청소년들의 좌우명이 되어 왔다. 클라크 교수는 “청소년들이 이기적인 성취를 위해서도 아니고 명성이라는 덧없는 것을 위해서도 아닌” 야망, 삶의 목적을 품으라고 고한다.
'BOYS, BE AMBITIOUS'
책상 위 벽에 붙은 문장이 나를 무두질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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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된 내가 방송국에서 일하게 되었고 학보사 주최 백일장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난 소설로 응모를 했다.
미술학도가 된 내가 처음으로 응모한 장르가 소설이었다.
제목이 '강다굴재'
어릴 적 살았던 동네에서 좀 더 오지로 가는 길에 재 하나가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재를 넘어 마을과 장을 오갔다. 그들은 장에서 농산물을 팔아 공산품을 샀고 서둘러 그 길을 넘어갔다.
지금은 길이 뚫려 사라졌지만 그땐 대중교통이 없었던 시절이다.
강도가 많아 <강다굴재>라 불렸던 곳
소시민의 애환을 조명한 글로 어설프게 썼던 것 같다. 최종심까지 올랐지만 낙방했고 그 뒤론 소설을 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소시민보다는 농사꾼의 삶, 극빈층의 애환을 다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랬다 한들 당선은 힘들었을 거다.
그때나 지금이나 표현력의 한계와 상상력의 폭을 넓히지 못해 늘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꾸준한 독서와 습작으로 그 부재를 메꿔 왔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