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여느 때처럼 쳇바퀴를 돌리고 있었다. 그날은 한가롭게 돌던 바퀴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 사라진 당신,
처음엔 노인정엘 갔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노인정이 일찍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상대로 노인정은 굳게 잠겨 있었다.
아흔이 넘은 어머니가 사라진 거다.
어머닌 조용한 보살, 또는 부처로 통할 정도로 말이 없으시고 성품 또한어지셨다. 도통 속내를 보이지 않고 기쁨도 아픔도 송두리 째 담고 있는 분이셨다.
표현하지 않고 사는 사람의 속내가 얼마나 문드러져 있을지 잘 안다. 상처는 곪고 곪아 우울증을 낳고 화병이 되기도 하고 종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노인정이나 친구집을 갈 때도 말없이 나가시기 때문에 그날도 그러려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내가 불찰이었다.
어머니가 더 말문을 닫고 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신의 셋째 아들이 65세 나이로 일찍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어미보다 일찍 저세상으로 간 자식은 어미 가슴에 묻힌다고 했다. 아들 중에서도 유난히 살갑고 어머니를 잘 챙겼던 아들이다. 그때 어머니는 반나절을 오열하셨다.
그토록 긴 울음을 본 적이 없다. 당신은 속에 품은 모든 슬픔 덩어리를 쏟아놓고 있었다.
난 함께 울다 달래다를 반복하다 결국 포기를 하고 말았다.
아주버님이 돌아가신 후 어머님은 조금씩 깊은 동굴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작은 일에도 툭하면 울음보를 터뜨렸고 멍하니 먼산 보는 일이 잦았다. 우울증이 시작된 것이다.
난 막내며느리였고 예상치 못한 경제적 몰락으로 풍파가 가라앉지 않을 때 혼자 살고 있는 어머니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남편은 부잣집 막내 아들이었다. 결혼초부터 비즈니스를 한답시고 늘 밖으로 돌았고 가정을 등한시한 사람, 어느 날 당신의 방랑이 멈출 수만 있다면 어머니를 모실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아이들에게 보이는 가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절실했기에 튀어나온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들 다 키우고 난 뒤 내게 자유가 열렸다고 생각했을 때 그 일이 현실화될 줄 몰랐다.
난 나름대로 아이들 키워놓고 시작하리라 벼리고 벼렸던 일들을 계획하며 실천에 옮기고 있을 때였다.
어진 보살 같은 어머니도 내 삶 속으로 들어오니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관계가 되었다. 고부 갈등까진 아니었지만 말 못 하는 불편함이 여기저기서 싹을 틔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누이를 비롯해 다른 가족들은 그야말로 손님이나 다를 바 없었다. 호의적이다가도 혀에 가시를 물고 있는 객, 여차하면 그 가시에 찔릴 수도 있어서 늘 긴장의 끈을 달고 살아야 했다.
처음 함께 살 때 여든둘이었던 어머니는 무척이나 정정하셨다.
큰 살림을 살아본 적이 없는 난 어머니가 수시로 사들고 온 먹거리 장만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마늘종이 나는 시기면 몇 다발을 사 왔고 난 곁에서 거들며 장아찌를 만들었다. 또한 당신은 고추장을 만들고 식혜를 만들고 백김치를 담그셨다. 그뿐인가 겨울이면 대구 한 마리 통째로 들여와 내장은 내장대로 알과 아가미는 젓갈로 버릴 것 하나 없는 생선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아가미가 단단해서 칼로 다듬다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기 일쑤였다. 그것들은 다섯 자식에게로 나눠졌다. 함께 사는 큰 며느리의 고충이 이런 거구나 체험하는 순간들이 많았다고나 할까.
그런데 어머니와 난 성격 합이 맞는다고 해야 할까 안 해도 될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도 싫지가 않았으니 말이다. 살아생전 잘 해 드리라는 친정어머니의 당부도 한몫했을 거다.
원체 말씀 없는 당신도 모든 일에 서툰 내게 불만이 있을 법도 한데 언제나 내 편을 들었고 야단치는 법이 없었다. 어린 막내며느리가 측은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술 마시며 늦게 귀가하는 남편 때문에 속상해하는 날이면 평소 말 없는 당신이 "내 같아도 너하고 안 산다. 내 아들이 이러는 줄 꿈에도 몰랐다. "라며 남편을 향해 성토를 하였다. 아들이 잘 못해도 며느리 탓으로 돌리는 가부장적이고 남존여비 사상이 확고한 경상도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러니 어찌 어머니가 싫을 수 있었겠는가
어머닌 말문을 굳게 잠그시더니 언어를 잃어 갔다. 우울증에 빠지니 퇴색하는 것은 육체만이 아니었다. 뇌가 녹슬기 시작하면 부지런히 기름칠을 해 줘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유지가 된다.
그런데 오히려 방치를 해버리니 병은 깊어만 갔다. 스스로 말하는 것을 꺼려하며 은둔으로 이어지거나 침참한 나날이 지속되고 있었다.
기억력이 급속도로 퇴화되고 어김없이 치매가 발명할 것이다. 우울증이 온 집안을 어둡게 했다.
당신 스스로 목욕을 할 수 없게 되자 집에서 하는 샤워가 시원찮아 일주일에 한 번 대중목욕탕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다녔다.
커다란 어린아이가 되어 온전히 몸을 내게 맡겨놓고 여전히 당신은 꿀 먹은 벙어리시다. 주변에선 다정한 친정어머니와 딸 사이로 바라봤다. 아마도 전생에 친정어머니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현생에서 며느리로 태어나 전생의 어머니께 보답을 하는 거라고
정신 줄 놓지 않으려 내면에서 얼마나 힘든 싸움을 하고 계셨을지를 안다. 어머니가 사라진 후 허둥지둥 당신을 찾기 위해 사방을 뛰어다녔을 때 당신은 또 얼마나 방황을 하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칼날 같은 아픔이 쿡쿡 쑤셔왔다.
죽은 아들이 그립지 않도록 잘해드려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는 자책이 밀려들었다.
9시 이전에 나간 어머니가 오후 1시가 다 되도록 도대체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다른 형제들이 알면 어찌 했기에 집을 나가시냐며 지탄할지도 모른다. 섣불리 경찰에 실종 신고하기도 두려웠다.
난 조금씩 지쳐갔다. 그런데 집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 길가 담벼락을 붙잡고 서 계신 어머니를 발견했다. 멀리서 봐도 분명 어머니였다. 기쁨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 모습을 발견한 비틀거리는 걸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머니가 날 붙잡더니 통곡을 하신다. 나 또한 어머니를 안고 펑펑 울었다. 우린 그렇게 도롯가 한 모퉁이에서 껴안고 서로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들 집 찾아 무작정 나섰다가 길을 잃은 것이다. 당시 어머닌 핸드폰 번호 누르는 것이 서툴 정도로 증세가 심해져서 어느 날부터 핸드폰을 잘 놔두고 다녔고 그때도 마찬가지여서 연락할 방법이 없었던 거다. 누군가에게 물어볼 용기조차 없는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이었던 것. 얼마나 배고프실까 생각되어 무작정 식당으로 모셨다 비빔밥을 드시겠다고 하여 주문을 하였다. 그런데 식탁이 차려지고 한 술 뜨더니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마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당황을 했는지 모른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않아 큰일 난 줄 알았다.
부랴부랴 남편이 도착을 했고 어머닐 부축하며 차에 태우자 다행히도 숨을 쌕쌕거린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배고픔도 무시하고 기절하듯 깊은 잠에 빠진 걸까 네 시간여의 시간 동안 두려움에 떨며 긴장했을 당신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졌다.
기억을 상실한 어머닌 결국 요양원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97세의 일기로 영면하셨다.
젊은 날 어느 하나 부러운 것 없이 살았던 당신의 마지막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지금도 밀물처럼 밀려온다.
그때 난 난치병을 앓고 있었고 병이 깊은 때여서 지팡이를 짚고 장례식장을 찾았다. 호상이라 울음 없는 영전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지 않았다.
가끔 어머니가 그립다. 명절이면 더 어머니가 생각나 환한 보름달을 보면 그곳 당신은 여전히 말없이 미소만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