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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ice 유니스 Jan 03. 2023

나는 걷는다.

나는 걸었다.


IMF의 여파로 수없이 많은 입사지원서 종이무덤 사이에서

합격통보전화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 시절에도

운동화끈 질끈 묶고서는

나는 걸었다.


‘나’와 ‘너’ 사이의 인연을 정리하고 돌아오던 그날에도

휘황찬란한 도시의 밤길을 따라

아무 말 없이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던 꿈을

내 손으로 산산조각내고 뒤돌아 오던 그날에도

마치 지구가 나를 내핵까지 끌고 내려갈 듯 무섭게 나를 끌어당겨

발걸음이 무겁던 그 길을

나는 걸었다.


꾹꾹 눌러 담은 감정덩어리들이 터져서

오장육부에서 쏟아져 나올 것 같았던 그날들에도

벗어날 수 없는 뫼비우스의 길 위를

나는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홀로 걷고 또 걷다 보면

혼돈과 망각의 지점에 다다른다.


화가 나서 심장이 뛰는 것인지,

걸어서 심장이 뛰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슬퍼서 눈물이 나는 것인지,

걷는 것이 힘들어서 진액이 쏟아져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나를 지배했던

머릿속의 수많은 생각들과

가슴속의 수많은 감정들은

육체의 고통에게 그 자리를 슬그머니 내어준다.


비실비실한 몸뚱아리가

펄떡이는 심장과 부풀어 오르는 폐와 수축하는 근육과 마디마디 관절들의 비명소리에

백기를 든다.


순례자들의 걸음이 그렇겠지?


고통의 자리를 떠나도 여전히 내게서 떠나지 않는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과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이 포기가 되지 않아

기어이 신을 찾아 떠나는 그 길 말이다.


나는 감히 감당하기도 힘든, 상상하기도 힘든 당신들의 거대한 고통 앞에서

나는 그저 고개를 떨군다.


사랑하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어느 여인에 비하면

내 삶의 고민들은 작디작기에

나는 그저 동네의 작은 길들을 따라

지친 나의 영혼의 구원과 평안을 구하며

오늘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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