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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Oct 07. 2018

[라디오레시피 #5] 장거리 비행 필수템

생방송 라디오, 시간 가는 줄 모를 때가 있으셨나요?

  유독 비행기를 많이 타야했던 한 해다. 그 흔한 어학연수, 교환학생도 경험하지 않았던, 오로지 '아나운서'가 빨리 되어야 한다는 조바심덕분에 해외경험치가 매우 낮은 나에게 올해는 그래서 참 특별했다.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지만 몇 주 전 중국 출장까지 잡히면서 대한민국 안 자칭 타칭 우물안 개구리였던 나는 요 몇 달간 '비행'을 단기간 초고농도로 경험했다. 오랜만에 타는 비행기는 늘 설렘 반 긴장 반이 아니던가. 올해 첫 비행기를 타기 며칠 전, 나는 핸드폰 용량이 허락하는 대로 내 취향저격의 영화를 꾹꾹 눌러담고, 백팩이 터지도록 읽을 책을 세 권을 구겨넣었다. 작년 기억에 따르자면 기내에 올라와 있던 영화가 단 한 편도 마음에 들지 않아 몇 시간을 켰다 껐다를 반복했으므로, 시행착오를 또 겪지 않기 위해서는 또 한번 다시 보는 한이 있더라도 내 스타일의 영화여야 했다. 뭔가 기분이 영화 볼 컨디션이 아닌데? 상태를 대비해 에세이. 소설. 자기계발서 골고루 챙겨넣었다. 가방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더라도 바리바리 보따리를 챙겨야만 하는 게 안 고쳐지는 내 성격이다. 그 때 그 기분에 하고 싶은 것, 공부하고 싶은 것이 내 손 안에 없으면 극도로 짜증과 후회가 넘쳐나기 때문에. 그렇게 최고의 짐꾼이 되고 나서야 올해 여름 첫 비행기에 올랐더랬다. 


"나 영화 10편 담았는데, 이거 괜찮을까? 오며 가며 모자라지 않을까"

"아니, 지구 한 바퀴도 돌겠는데?"



  그런데, 올해 이래저래 비행기를 많이 타고 내리면서 한 가지 '반전'을 경험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비행기에서 '영화'라는 매체에 잘 집중하지 못하는 부류였다. 가끔 한 두 번씩 비교적 짧은 비행을 할 때야 뭐 특별히 시간보낼 준비할 것도 없었고 간혹 간헐적으로 긴 비행을 경험한다고 해도 이래저래 적당한 영화 한 두 편 보면 괜찮았던 것 같았는데 말이다. 단 기간 정말 여러차례 비행기를 타보면서 비로소 33년 만에 내 성향을 깨닫게 되었다니. 아무리 내가 미처 보지 못한 히트작이 올라와 있었던 도무지 눈이 잘 가지 않아서, 오히려 이걸 기내에서 읽을까 하면서도 굳이 챙겨넣었던 책들을 오히려 편안하게 하나하나 완독했다. 예민한 성격 탓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소음이나 모션이 있으면, 혹은 조도가 내가 원하는 상태와 조금이라도 반하면 책에 잘 집중하지 못하는 편이데 오, 이건 참으로 명민한 발견이었다 ! 비행기에서 책 참 잘 읽는 부류였다니. 이후로는 핸드폰에 영화를 미리 챙기는 센스보다는 작은 백팩에 책을 최대한 많이 챙겨넣는 스킬을 키우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조금 무거워서 그렇지, 차곡차곡 잘 넣으면 다른 소지품 외에도 세 권은 챙긴다. 물론 책이 상하지 말아야 하니까 비닐팩 뽁뽁이에 조심조심 말아서.


올해 출장길, 날 버티게 해 준 책들


20대초반부터 늘 팬이었던 김신회 작가님 신간
















여권을 챙기는 것도 필수. 기나긴 장시간 나의 버틸거리 챙기기도 필수.


  비행기에서 장기간을 견디는 나의 성향을 찾아내고 난 뒤 뿌듯함과 동시에 찾아오는 또 하나의 호기심과 궁금증. 영화나 음악이 아니라 '라디오'였다면 어땠을까. 기내에서 영상콘텐츠보다는 활자에 비교적 잘 몰입했으나,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지 않고 귓가에만 콘텐츠가 주어졌다면 또 상황을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물론 이건 음악만 듣는 것과는 또 다르다. 기내 시스템에도 꽤나 여러 음악 장르가 혼재돼 있고 원하면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좋아하는 케이팝 음악들을 골라 담아갈 수 있지만, 스토리까지 같이 녹여내는 라디오 콘텐츠에서 음악을 듣는 것과는 가히 다른 방식이니까. 사전에 방송됐던 팟캐스트나 녹음방송을 다운로드 받아간다? 혹은 그러한 콘텐츠를 항공사에서 제공한다?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겠으나 여기에는 내가 '참여할 가능성과 방법'이 철저하게 사전에 차단된 상태이므로 '생방송 라디오 진행'의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없으니 패스. 현실이 될 가능성은 없을지라도 기내식 서비스나 면세품 서비스가 있듯이, 기내 라디오 서비스가 있어도 꽤 재미지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안 그래도 바쁜 승무원들의 일 부담을 늘릴 수는 없을테니 정말 철저히 외로운 '상상'이다. 그래도 꽤 괜찮은 발상 아닌가. 실시간 라디오가 고픈 승객들이 기내 시스템을 활용해 메시지 참여를 하는 거다. 여행가는 길인지, 참 마음에 안드는 출장길인 건지, 동행자가 마음에 안들어서 몰래 뒷이야기를 한다든지 (물론 동행자가 잠들어 있다는 가정 하에서 사연을 보내야하겠지만) 아까 먹은 기내식에 대한 칭찬도 불평도 좋고, 훌쩍 떠나오는 바람에 허전했던 마음을 달래달라고 위로를 조르는 메시지와 신청곡도 괜찮다. 기내 라디오 이거 괜찮은데? 이 방송 듣다보면 12시간 비행이고, 16시간 비행이고 시간 진짜 금방가지 않을까. 여기 항공사는 DJ승무원이 참 괜찮던데? 은근한 경쟁 구도도 생겨날 테니 비행기 탈 때마다 주파수 고르듯이 항공사 고르는 재미도 또 하나 추가되지 않을까나.



  아차차, 국적 다양한 승객들을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어로 했다가 영어로, 또 다시 불어로? 중국어로? 자유자재로 방송언어를 바꾸기엔 이거 참 골치 아프겠지. 그렇다고 내내 영어로만 방송되는 라디오라면...제 아무리 영어능통자라도 모국어 소통이 그리울 지친 여행객, 출장자에게는 오히려 스트레스일 테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신통방통한 라디오 매체를 비행기 내에서 활용하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긴 있었구나. 한껏 부푼 상상이 거품 가라 앉듯이 내려앉으면서도 "그래도 생방송 라디오 듣는 것만큼이나 시간 잘 가는 것은 없는데!" 라고 미련섞인 한 마디는 남겨둔다. 아니 그러한가. 고등학교 때 방학만 했다하면 낮12시부터 밤12시까지 라디오를 틀어두고 공부했던 적도 있던 내겐 더더욱이. 꽉 막히 독서실에서 같은 자리에 최대한 오래 앉아 버티는 힘은 다름아닌 라디오였다. 



늘 긴장되면서도 지루하기 그지 없는 장시간 비행에서,

혹은 같은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원치않는 무언가를 '버텨내야할 때'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어떤 환경 속에서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려야 할 때'

라디오 생방송은 꽤나 괜찮은 제안이다. 그 언젠가라도 기내에서만의 라디오가 가능해진다면 (물론 주파수로 방송하는 시스템은 아니겠지만요) 과감히 이 때만큼은 활자에의 몰입을 떨쳐내고 애청자가 되어야지. 기내 라디오 참여상품은... 인기 면세품으로 하면 어떨까요. 꺄아.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상상! 


장시간 비행에서는 창가자리가 오히려 곤혹스럽기에. 
네. 긴 시간을 버티려면 목베개도 필수템이겠지요? 살짝 포착
딱 날아오르기 직전까지 설렘설렘. 지루함의 향연이 시작되기 딱 바로 전

여러분은 기나긴 비행시간, 어떻게 견디며, 혹은 어떻게 즐기며 날아오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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