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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Oct 07. 2018

[라디오레시피 #4] 비도 오고 그래서

선곡하기 좋은 날 (FEAT. 가을날의 빗소리) 

  유독 태풍 소식이 많은 한 해다. 어제 오후 내내 포털 사이트 검색창을 켤 때마다 태풍 소식부터 눈에 찝혔다. 태풍 '콩레이' 북상 소식, 실시간 경로상황, 지난해 태풍 무엇과 경로 비슷할 것으로 보임...지역 축제 개회식 일정 연기 등등. 아니나 다를까 라디오 뉴스 당직 하러 스튜디오와 사무실을 오가던 중, 뜻밖의 소식까지 접하는 지경이 되었으니, "국장님, 축제 공개방송 취소됐대요. 완전히 전면 취소요!" 다급한 작가님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퍼진다.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과 출연이 예정돼 있던 사회자들도 너털웃음으로 허무함을 감추려 애쓴다. "거참,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 중얼중얼, 한숨이 덧대진 노곤노곤한 불평들이 잠시 오간다. 누가 알았으랴. 10월 이맘때쯤, 어떤 태풍이 우리 곁을 스쳐지나갈지,  얼마나 세찬 집중호우를 정확히 어디에 쏟아부을 것인지. 어느 정도의 일기예보가 따박따박 나와준다고 해도 사실 그리 크게 의지 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끄덕일 정도로만 의존하지 않았던가. 애교로 이해해줄 만큼의 빗줄기 정도라면 좋았을 텐데, 방송국 사람들에게 - 특히 야외 공개방송이 유독 많은 가을날의 일복터진 스태프들에게 - 비소식은 결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예쁜 우산, 고이고이 아껴둔 우산을 꺼내둘 수 있는 것도 비오는 날의 매력이잖아 ! (참고로 이 애정하는우산은 강릉지역 대단히 주름잡고 있는 뮤지션 엘리펀디의 핑크핑크한 센스선물)


  이렇게 참 천덕꾸러기 같은, 웬만하면 피했으면 좋겠다 싶은 존재가 '비' 같지만, 사실 라디오 방송에서 비는 다소 특별한 손님이다. 화창한 날씨에도 어울리는 곡이 있고 유독 하늘 파란 날 떠오르는 노래, 햇살이 너무 예뻐서 '도저히 이 노래를 안 들을 수 없잖아!' 싶은 노래들도 물론 있을진대, '빗소리'가 덧대진 날 듣는 노래는 뭔가 더 특별하게 들린다. 뭐랄까.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살짝 거칠게 빗대보자면,  그 어떤 초보 요리사가 겁없이 음식을 만들겠다고 덤벼도 웬만하면 실패할 리가 없는 만능 양념장 한 통을 손에 딱 쥐고 있는 느낌. 무슨 노래를 듣든 빗소리가 같이 묻어나면 평소 밍숭맹숭 심심했던 노래도 끈덕지게 몸에 착착 감기는 체험을 한다. "가수 ooo가 피처링만 했다하면 그 노래는 실시간 차트에서 곧장 수직상승하던데" 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던 걸 생각해보자면 하나의 노래를 감상하는 데 있어서 '빗소리' 역시 참 괜찮은 콜라보레이션 파트너다. 어떤 노래는 빗소리에 얹힌 공기 안에서 더 애절하게 들리고, 또 어떤 노래는 빗소리가 만든 그 특유의 차분하고 묵직한 공기감 때문에 유독 더 가사에 몰입하도록 이끈다. 빗소리의 높고낮음과 빗방울의 굴고 가늠과 그 어떤 경중과도 관계없이. 라디오진행자에게 비오는 날의 아침은 그래서 더 반갑다. 오, 오늘 방송 잘 될 것만 같잖아. 


보고만 있어도 좋은 빗방울, 내 힐링 파트너

"창으로 내다보는 빗방울이 너무 예뻐요"


"빗소리에 라디오 들으면서 커피 한 잔 마시는 지금이 너무 좋아요. 잠든 아기가 조금 늦게 깼으면 좋겠어요"


  이런 날엔 유독 더 진한 커피 한 잔을 타야한다. 커피를 테이크아웃할 여유가 되는 날엔 샷 한번 더 추가, 급해서 헐레벌떡 출근한 날엔 작은 봉지에 든 커피를 두 개 뜯는다. 왠지 농도 짙은 커피가 빗소리를 더 리듬감있게 들리게 해 줄 것만 같은 나만의 느낌적인 느낌. 뭐 나만의 라디오 즐기기 레시피라고 해두자. (비오는 날은 꼭 이 레시피를 활짝 펼쳐둘 것)


  청취자들도 비슷한 마음이리라.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을 평소보다 조금 더 늘어지게 즐기고 싶다는 사소한 욕망. 라디오와 빗소리의 콜라보레이션이 아주 조금만 천천히, 조금만 더 오래 내 곁에 머물러주었었으면 하는 그날만의 느긋한 나태. 빠릿빠릿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고 왠지 게으름 피우고 한 두개 정도는 빈틈을 보여도 허락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비오는 날. 살짝 허술하게 비춰질 빈틈은 라디오 소리가 메워줄 것이라는 적절한 기대감덕분인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날만큼은 청취율이 높아진다. 그걸 매일 어떻게 파악하냐고? 도착하는 문자메시지 개수가 확연히 달라지는 걸. 라디오를 요리하는 입장에서 '비가오는 날'은 곧 문자메시지가 많이... 아주 많이 오는 날이다. 잘 집중하자! 신청곡도 많고 비오는 날 그날, 그 때의 사랑이야기를 털어두시는 분들도 많다. (안 여쭤봤는데 자꾸 누군가가 생각난다는 건, 그래서 자동으로 술술 이야기보따리를 푸신다는 것은 이 또한 비의 요상한 힘덕분이겠지요. 매력덩어리 너란 녀석) 신기한 건 그 많은 분들의 신청곡들이 대부분 참으로 많이 겹친다는 점이다. 이래저래 사연은 다 다르고, 마음의 결 또한 그 때 그 때 시간 따라 공간 따라 일렁거리는 폭이 다양할 텐데,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비 내리는 날만큼은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한 마음이로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절실히 체감하고야 만다.


비 오는 날엔 그냥 커피 말고, 찐......한 커피 한 잔 !


  에픽하이와 윤하가 함께한 <우산>은 단연 넘버원 중 넘버원. 비가 올 때마다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신청곡으로 들어오는 인기리스트라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피해야 하는 금지곡 아닌 금지곡이 되어버린 최고의 신청곡. 조금 비가 굵다 싶을 땐 하루종일 헤이즈 <비도 오고 그래서>를 틀어둬도 알맞다. 아이유 <Rain Drop>도 단골 신청곡. (그러고보니 도입부부터 빗소리가 실제로 들어가있다는 무던한 공통점도 떠오르는 군) 영화 라디오스타 OST 속 <비와 당신>, 박정현이 다시 부른 버전으로 <비오는날의 수채화> 역시 아무리 못해도 비오는 날 최소 한 번은 꼭 언급되고마는 플레이리스트다. 윤하의 <빗소리>도 우산과 엇물려서 정기적으로 꼭 한번은 틀게된다. 오늘따라 기분이 좀 상큼하다 싶으면 프랑스어 실력과 전혀 상관없이 해이의 Jet'aime를 고른다. 방송 분위기가 허락하는 선에서 가끔은 French 버전으로 느껴보는 것도 색다른 묘미다. 비 내리는 날씨가 노래 안에 언급되지 않더라도 참 딱이다 싶은 노래도 종종 있었으니, 나얼 <Missing you>.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틀어두는 필수템. DJ의 취향이 이러하니, 우연히라도 청취자 누군가가 이 곡을 신청한다면 마음이 통했다는 생각에 선곡에 적극 반영할 수밖에! 


  인디밴드를 워낙 좋아하고, 특히나 정오의희망곡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인연을 맺은 뮤지션들을 개인적으로 애정하기에 주변 지인들에게도 적극 권장한다. 비오는 날 결코 센치해지는 기분 따윈 허락할 수 없다면 소심한 오빠들의 <비오는날 엔>을 꼭 들어보시라. 아마 당신은 오늘 저녁이든, 다음 번에 비가 내리는 날에든 꼭 부침개를 부쳐먹게 될 것이니! 데뷔초부터 워낙 유머 재치 넘치는 분들이라 소심하게 소심한 오빠들의 팬을 자처했다. (최근엔 리더였던 승호 씨 따로 '포레스코 Fore_sko'로 솔로 활동 중). 


  며칠 전 나온 바겐바이러스의 <광합성>도 비 내리던 엊그제부터 연일 반복재생하기 좋았다. 빗소리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 않은 제목인데, 정반대로 비가 스치는 창문을 보면서 내리 들으니 빗방울에 햇살이 일렁거리는 착각이 들었다. 오, 이거 참으로 괜찮은 반전이다 !!! <광합성> 곡이 발표된 날이 하필 태풍 소식이 있고 비가 많이 왔던 탓에 리더 한울 씨를 비롯, 바겐 멤버들이 속상했을 것 같기도 했는데,  뭐 해석이야 언제나 그렇듯 창작자가 요리하기 마련 아니던가! 태풍 몰아친 날조차 '광합성'을 꿈꾸며 노래하는 이들이라고 적당히 둘러댄다면 그 또한 최적의 타이밍이...일거예요! 라고 작은 위로를 건네본다. 실제로 노래 초반부에 '장마'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그 때 딱 빗소리가 적절히 녹아들기 시작하면서 이어지는 가사에 대한 몰입도가 실제로 높아지는 마법이 펼쳐지던 걸 ! 



가사가 너무 예뻐서 출퇴근길 '혼자있는 곳에서만' 큰 소리로 따라부른다는 건 안 비밀




바겐바이러스, 가을날 광합성 파이팅!


  어제 늦은 오후부터 강원 영서지역은 태풍이 물러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내일은 화창한 휴일 날씨를 보일 것으로... 주말 나들이 객들이 붐빌 것으로... 각 지역의 축제장에서는 일부 일정을 제외하고는 정상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뉴스를 마치고 나오면서 일요일 한낮의 쨍한 햇살, 살짝 얼굴 한쪽을 찌푸리면서도 이내 반가울 그 햇살의 존재, 잔잔히 회사 마당 끝자락에 맺힐 그림자 잔상에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빗소리의 마력, 그 마법같은 콜라보레이션의 힘은 살짝 여기에서 접어두는 걸로. 너무 자주 쓰면 비밀병기의 빛바램도 빨라질까 자꾸만 조바심이 날테니. 또 한번 촉촉하게 라디오를 피처링해 줄 그 어느날을 기다려본다.  

2018년 가을. 비도 오고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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