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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Sep 12. 2018

[라디오레시피 #3] 당첨선물 이야기 (2)

"네? 제가 비키니수영복이 당첨되었다고요?"

"오늘의 당첨자는 !!!"

"뒷자리에 2번 들어갑니다. 삐뽀삐뽀"


긴박한 경고음이 라디오 주파수를 타고 흐르는 순간. 듣는 사람 쪽이든, 말하는사람 쪽이든 양쪽 모두 긴장한다. 이게 뭐 대단히 별거라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까지 넣어? 싶겠지만 이게 은근히 사람 초조하게 애를 태운다. 내 전화번호에 2번이 들어가면 대단한 사연을 보내지 않았더라도 혹여 진행자가 낸 문자퀴즈 정답을 틀렸더라도 귀가 자동으로 스피커를 향해 기운다. 혹시나 나 아니야? 하는 심리는 어렸을 때나 나이가 다소 들었을 때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가 그랬으니까. 어렸을 때 교육방송에서 내가 신청한 동요가 나오는 건 아닐지 1분1초 귀를 기울였을 때도 그랬고, 첫출근길의 초조한 심정을 담아 새벽방송 라디오DJ에게 사연을 보냈을 때도 그러했다. 사연만 읽어줘도 좋았는데 게다가 내가 당첨의 주인공이라고? 세상에 !


오늘의 당첨자는 누구일까요. 두구두구두구두구 빰빰




때는 바야흐로 2009년. 지금은 종합편성채널이 된 당시 보도채널 한 곳에서 수습기자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정말 빼곡히도 욕을 먹고 있을 때였다. 시청자에게로부터가 아니라, 직속 선배에게로부터. 지금은 안다. 그도 내가 미워서 나를 유달리 혼내고 다그쳤던 게 아니라는 것을. 그저 뻑뻑한 기자 훈련 교육과정의 일부였다는 것을. 하지만 대학을 갓 졸업한 만23세 여자사람에게 그 모든 것은 너무 가혹했다. 언젠가부터 아침에 눈을 떠서 출근준비를 하는 과정 1분1초가 심각하게 싫어졌다. 입사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이 지경이라니 나는 진정 '낙오자'의 길을 걷고야 마는가 속상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거의 매일 울었고 매순간이 잔인했다.


다행히도 그럴 때면 썩 괜찮은 해결책이 있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순간에는 종종 이어폰을 끼고 라디오를 들었는데 딱히 선호 주파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아침엔 배성재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었고 오후엔 틈틈이 눈치를 보며 스윗소로우의 목소리를 들었다. 점심시간엔 살짝 빠져나와 지금까지도 건재한 최화정 언니의 목소리를 들었고 밤엔 누구였더라. 그 누군가의 아이돌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장르와 분위기를 굳이 한정짓지 않고 무조건 많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힘들어죽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 건지, 다행히도 나만 힘든 건 아닌거 맞지? 하고 때때로 확인하고 싶어했다. 몸과 마음이 힘들다는 핑계로 컨디션도 외모도 결코 자랑스럽게 내보일 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그래서 조기 취업자라는 자랑스러운 타이틀 밑에서도 친구만나기는 꾸준히 피했다.  소리와 화면 모두 요란한 매체는 부담스럽더라. 그래서 라디오가 편했다. 누굴 만날 필요도, 시끌벅적함에 노출될 필요도 없는데 위안이 되는 매체였다. 


수습기자 때는 보도국을 뛰어넘어 다른 세상, 라디오 스튜디오에 들어서기만 해도 힐링이 되더라


"출근한 지 석달 된 수습기자예요. 아침부터 경찰서에 가야 하는데 힘내라고 응원 좀 해주세요"

나 역시 꼭 읽어주길 바라고 보낸 문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방송 끝나기 직전 툭 던진 메시지 한 통. 출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고 싶은데 딱히 보낼 상대도 없고 꾹꾹 번호를 누른다는 게 라디오 생방송 문자창이었으니. 엇, 그런데 클로징 음악 도입부가 흐르면서 마지막 곡을 소개하던 아나운서가 다급히 이야기 한다. "방금 도착한 문자네요. 수습기자분 오늘도 출근 힘내세요. 선물 보내드릴게요" 굉장히 짧은 순간이었는데 상당히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날 역시 선배에게 어김없이 깨졌고 기사연습은 엉망이었고 취재한답시고 경찰서에서 형사분들과 실랑이를 벌인 것은 똑같았지만 이상하게 그날만큼은 은근히 버틸만 했던 기억이 난다. 어머, 나 라디오에서 아나운서한테 선물받았거든. 뭔지는 모르지만 뭔가 받은 사람이거든. 여기저기에서만 상처투성이가 된 것같은 나날 속에 누군가가 나를 '당첨'시켜줬다는 쾌감은 일시적일지라도 방전된 체력에 에너지를 넣어주기에 꽤나 괜찮은 처방약이었다. 아, 이런 거였구나. 당첨 선물을 받는다는 것.




그러부터 6개월 정도 지났나? 정체 불명의 택배가 도착했다. 난 주문한 적이 없는데? 웬 비키니 수영복이야. 그것도 이도저도 아닌 아주 모호하기 그지 없는 미듐사이즈. 난 핑크색, 아주 여리여리 파스텔톤을 좋아하는데 새파란 색깔에 에메랄드 스티치가 섞인, 뭐랄까 남미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오를 것 같은 인어를 연상케 하는 아주 몽환적인 디자인. 나중에야 발견했다. 아! 그때받은 라디오 선물이었구나. 때마침 여름날이었기에 야외 수영장 한번쯤 가기 괜찮은 날들이 이어지고는 있었지만 파격적인 디자인과 뭔가 한껏 들뜨는 사이즈에 난 서랍에 그 아이들을 고이고이 모셔둬야했다. 참 신기하게도 단 한차례도 활용할 수 없는 선물인데도 화가나지는 않았다. 아마 라디오에서 선물이 당첨된다는 일련의 과정을 깊이 고찰해 보건대, 실물보다는 감정으로 보상받는다는 느낌이 더 앞서는 모양이다. 실상 활용할 수 없는 선물을 받을지라도 누군가가 내 사소한 심경을 읽어주는 수고를 감내했고 그속에서 그가 나를 특히 골라내주었다는, 그래서 내가 그날만큼은 내 하루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는 데서 오는 실로 고마운 마음. 선물이 수개월 뒤에 오든, 혹은 배송차질로 오지 못하든 나는 그날만큼은 '좋은 하루'를 선물받았으니까. 물론 여전히 생각해본다. 입을 수 있는 사이즈의 수영복이었다면 더 좋지 아니했을까나. 더불어 색깔이 평범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고요 !


선물이 무엇이든! 라디오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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