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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Sep 12. 2018

[라디오레시피 #2] 당첨선물 이야기 (1)

너와나의 연결 고리 "선물이 아직 안왔어요"

  고요하던 사무실에 요란한 전화벨 소리. 지역방송사의 특성 중 하나라고 한다면 이 또한 그에 속할까.  아니, 그중에서도 특히 강원지역 특유의 무덤덤함과 요란하지 않은 고요한 그 무엇의 경계에 얹혀져 있는 덕분일까. 작은 나라 작은 도시 그 가운데서도 꽤나 작은 규모의 방송사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요란한 전화벨 소리는 참 익숙지 않다. 한 마디로 시청자의 불만과 항의, 건의사항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그래서는 결코 안되겠지만 진행자로서 소소한 실수를 했을지라도, 사실 건의전화가 물밀듯 밀려들지는 않는 편이다.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 경우가 대다수. 시청취자의 민감한 반응을 시시각각 체감하며 방송제작에 반영하는 것은 늘 바람직한 일이겠으나 제작자 진행자로서는 다소 늘 긴장감을 늦출 수없는 뼈아픈 노력의 길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할 테다. 방송권역이 좁고 자연스레 지역 내 한정적인 권역에만 콘텐츠가 송출되다보니 불만과 항의 전화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는 업무환경. 하지만 그 적은 통화량 가운데에서도 늘상 날 바르르 떨리게 만드는 '전화'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선.물.발.송에 관한 문의 전화.


선물은 언제 오나요? 이렇게 초롱초롱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요 !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선물 없는 데일리 방송을 만든다는 것은 결코 상상할 수 없다. 2010년 겨울, 춘천MBC 입사 직후, 별밤지기 자리를 선임자에게 물려받을 때 앞서 진행하고 있던 선배님 한분께서는 의미심장하게 한 마디를 흘리셨더랬다. "생방송 진행 익히는 것도 물론 중요한데 일단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선물 협찬인 것 같은데?지금 청취자한테 줄 선물이 별로 없거든요." 당시 앞서 진행하고 있던 선배 역시, 공식 후임자가 뽑힐 때까지 일시적으로 빈 공백을 잠시 대신해 진행해 주고 계셨던 상황. 선배님 역시 본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선물협찬을 유치할 상황은 아니셨다. 다만 라디오 참여를 유도할 만한 결정적인 선물 협찬이 없다보니 라디오 진행 분위기가 다서 퍽퍽하다는 점을 호소하셨을 뿐. 전통이 워낙 깊어 누구나 들으면 알 만한 프로그램일진데, 사실상 '별이빛나는밤에' 춘천권역 방송은 이래저래 메말라 있었다. 서울본사의 상황과 작은 지역계열사의 형편을 수평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의미없을 수 있겠으나, 열악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렸다. 공식적으로 책임질 사내인력이 전무했다보니, 진행자와 작가 기본인력이 부재했음은 물론 선물협찬은 마르고 마를 대로 말라 있었다. 어디보자. 네일케어 상품권, 지역 영화관 티켓, 그리고 비누세트 정도. 지금 생각하자면 뜨악할 정도가 아닌가. 요즘 흔히 선물하기 좋은 카페 이용쿠폰, 춘천 지역에서라면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닭갈비식당 식사권조차 없었다니. 입사초년생 아나운서로서 사태의 심각성을 몰랐던 것이 어쩌면 그 시절로서는 다행이지 않았나 싶다. 


자, 그 가방에는 무슨 선물이 들어있나요 ! 내놓으시지요


  좋은 콘텐츠, 좋은 음악으로 승부하면 되지 않나? 그만큼 역량을 기른 진행자가 성의껏 진행하면 충분히 퀄리티가 보장된 방송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맞다. 옳은 이야기다. 하지만 10년 남짓, 매일 선물 당첨자를 고르고 정확하고 빠르게 발송하는 일에 다분히도 애를 먹고 있는 것을 고려하건대 선물은 라디오에서 상당히 중요한 할당량을 차지하는 것은 분명하렸다. 가장 객관적인 지표를 들어 이야기하자면 솔깃할 만한 선물을 제안했을 때 그날의 청취자 참여도는 수직상승한다. "오늘은 혼밥하고 계신 분들 중에서 다섯 분께 커피빵을 드립니다", "오늘 복날이래요. 고마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 적어주시면 저희가 바로 한우세트 보내드릴게요." 이 멘트 한 마디에 그날 DJ들은 밥 안 먹고 진행해도 충분히 배가 부르다. 문자메시지가 상상도 못할 만큼 쏟아지기에! 매일 라디오 사연과 신청곡을 먹고사는 진행자에게 사연부자가 되는 것만큼 좋은 일이 또 어디있겠나. 노파심에 이야기하건대, 물론 선물 당첨여부와 상관없이 그날그날 방송에 충성도를 보여주는 청취자도 많으시다. 본인은 선물 많이 받았으니 한사코 더 받지 않아도 된다고 사양하시는 분도 당연히 계신다. 하지만 참여 자체가 낯설었던 새내기 새싹 청취자에게 선물은 달콤한 유혹, 참 괜찮은 동기부여제가 되는 것임은 분명하다. 곳곳에 잠재돼 있던 청취층을 발굴하고 참여를 유도하는 데는 선물만 한 것이 없다. 



"선물은 나도 기다린다냥 냥냥" 

  

  이렇게나 중요한 '선물'이다 보니 "도대체 선물발송은 언제되는 거예요?" 항의전화가 걸려올 때면 두피의 엷은 혈관마저 하나같이 얼어붙어버리는 느낌이다. 앗, 내가 또 무엇을 놓쳤단 말인가! 당첨되셨던 분들의 주소나 연락처를 혹여 누락했던 것은 아닐지, 선물이 전혀 다른 곳으로 잘못 배송된 것은 아닐지, 협찬 업체에서 너무 바쁘셔서 미처 챙기지 못하신 것은 아닐지 조마조마 초초해진다. "문자메시지 사연 당첨되신 이후로 실제로 받으실 때까지 길게는 한 달까지도 걸릴 수 있어요. 많이 기다려주셔서 너무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만 전화기 수화기로 같은 말을 예닐곱번은 반복한 것 같다. 이쯤하면 때때로 홈쇼핑 콜센터에서 택배관리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래도 알고 있다. 라디오 진행에 있어서 선물이란, 방송참여도를 결정적으로 높일 수 있는 깜찍한 매력덩어리라는 것을. 



"이번 1주년 때는 뭐 사줄거야?" 

"생일 때 무슨 선물 갖고 싶어?"


어쩌면 연인 사이 사랑을 속삭이는 데 있어서 결코 빠져서는 안되는 것 중 하나도 선물 아니던가. 가격의 높고낮음을 떠나서 너가 나의 마음과 존재를 이만큼이나 생각해주고 있구나라는 것의 가장 객관적인 징표. 아무리 사랑이 열렬한 사이라고 한 들, 선물 없이 난 너에게 이만큼의 사랑만 받으면 충분하다고 부르짖을 수 있는 관계가 몇이나 될는지. 진행자와 청취자 사이도 적당한 초기 연애단계에 들어선 커플같지 않을까. 선물이 있고없음이 관계자체에 심각한 균열을 주진 않지만 어쨌든 있으면 빛바래가던 썸에도 다시 며칠간은 뚜렷한 활력을 줄 수 있는 정도는 되니까. 참고로 현재 내가 진행하고 있는 <정오의희망곡>에서는 닭갈비세트와 워터파크 수만 원 상당의 가족이용권, 지역의 이색 식재료를 활용한 마카롱세트가 인기가 좋다. 다행이다. 지금 이순간 라디오 곳간이 풍성해서. 당분간은 선물이 메마를 걱정은 안해도 되겠는 걸. 당신과 나의 빠져서는 안 될 연결고리. 아차차! 이렇게 귀한 선물을 라디오 제작에 협찬해 주시는 강원 지역의 중소업체 대표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꾸벅. 


먹는 선물, 식사권 선물이 가장 인기가 많지요. 사진은 협찬처와 무관하옵니다. 햄버거식사권도 있으면 당첨자 분들 많이많이 좋아하실텐데 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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