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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Sep 12. 2018

[라디오레시피 #1] 사연을 '해동'해드립니다.

주말 휴일, 라디오 진행이 궁금하신가요?

"주말 잘보내세요. 고생많으셨어요!"


아이코 후련해. 주말 휴일 녹음이 모두 끝났다. 주7일 연중무휴 라디오 프로그램을 생방송으로 진행한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진행자들도 평범한 노동자일 뿐인지라, 단연코 말하건대 그건 무.리.다. 물론 지역민과 활발하게 소통하기 위한 취지를 내걸고 주말에 강원지역 축제장에 나가 오픈스튜디오를 할 때도 있지만 몇 차례 그러고 나면 주말에 쉬지 못해 결국 종종 탈이 나곤 한다. 대부분 월화수목금 생방송으로 라디오를 만들지만 주말엔 대개 평일 틈틈이 사전녹음을 해둔다. 미리 도착해 있던 사연들 중 시제에 크게 예민하지 않은 사연들, 혹은 도착해 있던 사연들 중에서 차마 시간관계상 소개해주지 못했던 사연들이 주인공이 된다. 함께 진행하는 DJ선배는 이 과정에 상당히 창의적인 비유를 덧댔다. 사연을 냉동고에 '얼렸다'가 주말에 '해동해드린다'고. 




사연을 얼렸다고 해동한다고? 오호, 그러고보니 그것 참 맞는 말이다. (함께 진행하는 파트너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또 떼어내 이어보겠지만 이분 참 표현이 맛깔지다. 더많은 이야기를 기대하시라) 생각해보라. 따끈따끈한 빵을 샀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너무 배가 불러서 손도 못댄채 남겨두었다면 이거 어쩔 것인가. 생활의 지혜를 발휘해야지. 많은 어머님들이 그러하시듯, 그대로 냉동고에 고이고이 넣어두었다가 나중에 배고플 때 살짝 꺼내놓으면 어느새 그 음식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표면을 사르르 녹여내고 언제 그랬냐는듯 원래의 폭신함 감촉을 되찾으려 발버둥친다. 여기에 전자레인지나 오븐의 도움을 받으면 상태는 노릇노릇 알맞게 식감이 무르익는다. 사연과 신청곡도 마찬가지 원리 아닐까. 아주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못할지라도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다. 아껴두고 모셔뒀던 이야깃거리들은 진행자들의 해동능력에 따라 다시 돌아와 듣기 좋게 요리될 수 있으니. 때론 급하게 먹어 소화시키는 것보다 천천히 시간을 갖고 재조리하는 게 더 맛이 좋을 때도 있다. 


맞아요! 베이글도 고대로 냉동실에 얼려두었다가 오븐에 데워내면 말짱하게 바삭+폭신해진다고요


 전국구도 아닌, 대한민국 작은 땅덩어리, 그 중에서도 동쪽, 강원권역의 방송만 책임지고 있을 뿐이기에 문자메시지가 많이 쏟아진다고 해봐야 하루 천 건에 못미치는 것이 현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일일 문자 1000건을 기록했을 땐 기록 중의 기록이었다. 작은 지역계열사에서 이정도 메시지를 받아냈다는 것 자체에 조금은 우쭐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숫자 기록은 그저 기록일 뿐. 매일 메시지 한 통 한 통에 배가 부른 진행자에게 사연 하나하나, 미처 소개를 못한 게 있다면 생각할 수록 너무 아깝다. 생각해보라. 눈 앞에 동그랗고 예쁘게 부푼 빵이 노릇노릇한 빛깔로 내 앞에서 미소짓고 있는데, 손도 못댄채 보고만 있어야 한다면 ! 주말과 휴일을 활용해 메시지 해동 역할을 재기발랄하게 해내는 것이야말로 귀한 사연에 대한 예의이자 진행자 제작자의 멋진 의무렸다. 



  때때로 실시간 사연을 얼렸다가 해동한다는 것이 다소 죄책감을 부를 때도 있었다. 너무나 간절했던 순간 누군가의 한마디가 나의 하루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만약 그 타이밍을 놓친다면 그 모든 게 부질 없어지는 것은 아닐지 조바심이 났다. '얼렸다가 해동한다'는 일련의 과정 안에는 무언가를 바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묵혀둔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던가. 이러한 시간이 때론 누군가를 이내 섭섭하게 느끼게 할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는 데서 오는 작은 패배감까지도 알게모르게 맛보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덧붙이자면 다행히도 '해동'과정은 소소한 서프라이즈를 주는 매력이 담겨있었다. 얼려둔 줄도 몰랐던 레몬마들렌이 내 눈앞에 무심코 딱 발견되었을 때의 감격을 아는가 ! 출출한 시간 기대하지도 않았던 내 소중한 디저트를 새파랗게 얼어붙어버린 냉동고에서 딱 찾아냈을 때의 쾌감. 보기만 해도 허기가 사라지는 것 같다. 놀랍지 않은가. 아주 처음의 상태를 되찾지 못해도 기대 안했던 상태에서 내 기대를 채워줄 무언가를 발견하면 오히려 그 만족감은 때때로 배가된다. 이 또한 사연해동에서도 재현이 되더라. 


"어머, 생각지도 못했는데 오늘 제 사연이 나오네요! 고맙습니다. 정오의희망곡"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 어머 내 사연이야? 서프라이즈 즐길 준비 되셨나요?




  잊고 있던 간식을 다시 찾아내고 맛볼 수 있는 감격.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다시 한번 따끈하게 데워낼 영혼의 먹거리가 있다는 데서 오는 포만감. 주말 휴일 라디오를 만드는 재미는 이 원초적인 본능을 맛보는 흥에서 찾아온다. 그때 소개해드렸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아, 미처 그때 챙겨드리지 못해서 너무 죄송해요. 이 마음만큼은 진심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깨닫는다. '그때'가 아닌 데서 오는 차선의 선택이 또다른 흥분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을. 그때를 꼭 고집하지 않아도 마음을 채워주는 데는 즉각적인 타이밍만이 꼭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사랑받고 싶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꼭 '그때' 응답해주지 않았다고 해도 뭐 어떠한가. 결국 또다른 형태로 응집되고 데워진 리액션은 결국 나를 들뜨게 하지 않았던가. 때가 지난 사연일지라도 잘 요리하면 더 좋은 요리가 됨을 더 절실히 체감하는 요즘이다. 고백하자면 지금 이글을 쓰는 순간은 토요일이며, 게다가 오후이며, 더 솔직해지자면 나는 서울 어느 카페에서 이글을 쓴다. 말하자면 나는 오늘 생방송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녹음된 방송은 앱을 통해 내 귀로 흘러들고 있다. 이쯤하면 눈치채셨죠? 오늘 방송된 사연들 모두 맛깔지게 해동해드렸어요. 



잊고 지냈던 나의 따끈한 간식을 다시 맛보는 재미, 라디오에서도 함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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