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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Mar 03. 2021

아기 키우며 ‘박사’ 해보셨나요?

미국 박사 도전기, 두 번째 이야기

맘처럼 시간을 쥐락펴락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인정해야만 하는 나날들. 아기를 키우면서 무언가 내 꿈을 향해 선다는 것은 어쩌면 ‘한계를 어쩔 수 없이 끄덕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늘은 아기가 낮잠을 언제쯤 자줄지, 푹 자고 일어나서 생글생글 기분이 좋을지, 아니면 뭔가 심술이 나서 하루 종일 징징징 보챌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일. 아기의 컨디션에 따라 오늘 하루의 수많은 변수들이 생겨나고 또 기가 막히게 다양한 변이를 거쳐 하루 24시간을 조물락 조물락 만들어낸다. 이런 하루 속에서 내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만만치 않다.


내가 가야할 길. 오늘의 변수는 다름아닌 육아.


“잠은 요즘 좀 자니?” 시댁 어르신들의 물음표. 돌 가까이 성장했으니 아기는 그럭저럭 수면습관을 잡아가고 있을 터, 그렇다면 며느리가 그나마 신생아 육아 때보다야 수면의 질이 좀 나아지지 않았겠나, 조심스레 예상하셨을 것이다. 내 대답은 힘 없이 No. 이뤄내고 싶은 꿈이 있으니 ‘노력’은 해야겠는데 아기랑 하루를 부대끼며 보내노라면 아무리 아기의 낮잠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내 시간’ 쓰기가 쉽지가 않다. 결국 밤의 시간을 기대해두었다가 아낌없이 쓰는 수밖에. “아기 잘 때 자야 한다”는 말은 여전히 적용되기 힘든 육아의 나날이다. “아기 잘 때 뭐라도 해야 한다.” 뭐라도 이뤄내고 싶다면 말이다.


“잠은 요즘 좀 자니?”
“아뇨, 아기 잘 때 안 잘 건데요”


아기와 내 꿈. 육아와 내 공부. 결코 조화롭게 순순히 그라데이션 되지 않을 영역을 쉼 없이 오간다는 게 적잖이 스트레스가 됐던 모양이다. 특별히 불편했던 기억이 없던 부위인데 며칠 전부터 위장의 꼬임 증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단순히 일시적인 복통이라고 하기에는 통증이 만만치 않았고, 간헐적으로 지속됐다. 약을 먹고 무서운 통증은 임시로 가라앉혔지만, 딴 게 아니라 이 모든 게 두 영역에 대한 압박감이 짓누르는 ‘스트레스’ 탓일 거라는 짐작이 어렴풋이 스쳤다. 마치 엄청나게 중요한 시험과 숙제를 앞두고 긴장하듯 매일을 그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으니 아무리 건강한 몸인들 이 비정상적인 마음의 흐름을 반길 수 있을까. 짐작은 짐작일 뿐, 어쨌든 조만간 건강검진도 ‘정밀’하게 받아야 하는 숙제가 또 생겼다. 평일엔 육아와 공부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야 하니, 병원 가는 데 시간 쓰는 일도 토요일이나 돼야 가능하다. 생각하고 계산해야 할 것들이 참 많다.

이젠 혼자만의 꿈만을 위해 올곧이 집중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미국에서 박사 하면서
애 둘 키우는 학생들도 꽤 있어요.”


“어머 저도 아기 키우면서
박사 과정 중이에요. 파이팅이에요.”


석사과정 중 교수님의 조언, 그리고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종종 들어오는 따뜻한 응원이 말들. 종합해보면 육아하면서 ‘박사 딸 수 있다’.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이미 해낸 사람들도 많다는 이야기. 개개인의 분야가 다르고 처한 환경이 제각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일반화’해버리고 싶은 부분이다. 이미 해낸 사람들도 있으니 나라고 못할 것도 없다고. 그러므로 나도 할 수 있다고. 평소 친분이 있던 사람이 아닐지라도 누군가가 해냈다는 말을 들으면 그 즉시 ‘바르르’ 희열이 생긴다. 아니, 덜컥 근거 없는 용기가 샘솟고 만다. 마치 내가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체계적인 reasoning 과정 없이 떡 하고 생겨나는 것마냥. 그들도 했대 + 저들도 했대 = 오오, 그러니까 나도 할 수 있겠네! 이 무슨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란 말인가. 이렇게라도 꿈을 놓고 싶지 않은 거겠지. 육아가 너무 힘드니까.


네가 오후 4시에 낮잠 들어준다면 엄마는 3시부터 공부할 준비하고 있어도 되겠니? 네가 허락해주기만 한다면 말이야.


그래도 최우선 순위는 아기.
아프지만 말아줘.
너도, 그리고 나도


내 삶, 내가 지향하는 가치, 내 꿈 모두 소중하고 귀하고 예쁘다. 하지만 아기는 말할 것도 없이 최우선 순위. 모든 부모가 그렇겠지만, 아기가 혹시라도 아프면 모든 일상이 마비된다.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중, 당시 예방접종을 하고 온 아기에게서 접종 열이 만만치 않게 느껴졌던 새벽의 기억. 나도 남편도 두말할 것 없이 새벽부터 한밤중에 이르기까지 꼬박 열 내리기 밀착 케어에 매달렸다. 리서치고 강의고 각종 영어단어들에, 넘쳐나는 영어 논문들이 다 부질없던 순간이었다. 공부 한 줄, 연구 한 줄 더해서 뭐하나 아기가 아프기라도 하면 모든 건 일시정지. 되려 내 꿈에 집중하느라 혹여라도 아기의 미세한 신호들을 놓친 건 아니었을지 쉼 없이 자책하게 된다. 나의 뭉툭한 꿈에 조금이라도 다가서 보겠다고 너의 예쁜 눈빛과 사르르 녹아드는 미소를 가벼이 휙 지나버린 것은 아닐지, 그러다가 작은 불편함을 알아채지 못하고 널 아프게 만든 건 아닐지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는 순간을 마주하고야 만다. 부디 아프지만 말아줘.


틈새시간에
간신히 GRE 단어를 밀어 넣고
아들 눈치껏
리서치를 힐끗대는 나날들


미국 박사 도전. 그 거칠고 뭉툭한 꿈을 향해 뚜벅뚜벅 묵묵히.


새 학기 첫날의 설렘이 똑똑똑 찾아오는 3월. 아기가 없을 땐 “이제 정신 차리고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자기 계발 게을리하지 말아야지” 류의 다짐을 새겨 넣는 달이었지만 이젠 얘기가 사뭇 다르다. 아기의 첫 사회생활, 어린이집 입소를 준비하고 각종 준비물을 챙기며 또 다른 새로움과 다짐을 그려나가는 일상. 그 틈새시간에 간신히 GRE 단어를 슬쩍 끼워 넣고 교수님과 진행 중인 리서치를 빼꼼히 눈치껏 들여다보는 초봄의 오후들. 이러다 보니 남편에게 돌연 볼멘소리 튀어나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 박사 할 수 있을까? 이대로라면 아들 대학 보내고 나서 박사 따는 거 아닌지 몰라.” 퉁퉁 불어 터져 버린, 하루 이틀도 아닌 투정을 듣고 남편은 말한다. “당연하지 나도 했는데 너라고 못할 리가. 당연히 할 수 있지.” 희망고문이든, 잔소리를 막으려는 임시방편이든 잔잔한 남편의 조언은 ‘그래도 힘이 된다’. 그래서 오늘도 힘을 짜내 보는 걸로! 서툴기 그지없는 오늘의 육아 임무와 우당탕탕 좌충우돌 미국 박사 도전기, 그 양다리 걸치기는 그렇게 오늘도 간신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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