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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Jun 19. 2019

돌연 '웨이브'가 생긴 날

[아나운서 그만두고 34가지 일상기록-11] 파마한 건 아니에요

“너무 죄송해요. 어떡해요. 파마가 안나와서요”

파마를 해도 파마가 안 먹는 머리.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고백하기 슬프지만 99.9% 사실이다. 미용실에가서 서너시간을 꼬박 앉아있었는데도 파마가 안나온 적이 자그마치 세 번이나 있었다. 각각 다른 미용실. 다른 디자이너. 어느 정도 파마라는 것을 했구나 티라도 나면 그냥 '자연스러운 웨이브가 요즘 트렌드잖아'라고 우겨볼 텐데. 아예 시술을 했는지 안했는지 티가 안나는 정도에 이르다보니 디자이너 쓰앵님들마다 제각각 돈을 받지 못하시겠다고 미안함을 표현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시간들이고 공들여 주신 쓰앵님이나 잠자코 얌전히 한 자리에만 앉아있던 나나 머쓱하기는 마찬가지. 이쯤하면 그 어떤 미용실의 문제라기보단 내 머리카락 본연의 문제라는 거.


휴대전화 배경화면에 매일 등장하는 이 분의 웨이브는 그림의 떡. 결혼사진 속 공주놀이하던 날의 머리는 내머리가 아니었어요


주인이 까다로운 탓일까. 머리카락까지 참 까다롭기도 하지. 그 오랜 시간 약품을 바르고 롤을 말고 있고 우주인을 연상케 하는 괴상한 기계를 머리에 장착해서 뭔가를 구워내고 요리해내는 듯이 너란 아이를 세심히 만져주는데, 시간이 지나도 상태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라니. 거참. 같은 경험이 꽤나 여러 번 반복되다보니 "아, 이건 파마 따위는 욕심내지 말라는 징조려나보다" 안해, 안해 다짐도 꽤나 했다. 가끔은 여신 머리를 연상케 하는 '긴 머리 풍성한 웨이브', 일명 라푼젤 웨이브가 너무 부러웠으나,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마법의 고데기라고 별칭이 붙은 기기에 눈을 돌리는 수밖에.


슬쩍 보이는 포니테일에서도 힘없는 뻗은 머리카락은 늘 콤플렉스


마음을 내려놓으면 돌연 채워지는 법이던가. 파마머리를 포기하고 살아온 내게 웨이브 머리가 불쑥 찾아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몇번은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매일 거울을 보면 볼 수록 신기했고 또 신이났다. "Ellie, Did you get a perm?”  우와, 심지어 오늘 머리하고 왔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아무 노력도,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헤어롤도, 고데기도, 부끄럽지만 심지어 소소한 빗질까지도! 솔직히 말해 유학생, 초보 정착자에게 그건 좀 사치일 것 같다고 혼잣말하던 요즘이었다. 질 좋은 머리카락을 위해서, 예쁜 스타일링을 위해서 신경을 기울인다는 건. 그나마 한국에서 줄곧 쓰던 특정 브랜드 샴푸라도 계속 쓸 수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미국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내려놓게 된 욕심 중 하나가 단연 '머리손질'이었기에 (미용실 너무 비싸잖아요) 머리를 돌돌말아 실핀으로 고정하거나 그냥 머리 말린 채로 머리 띠 정도만 하고 다니고 있었다. 최대한 빗자루를 면해보고자 가져온 에센스만 발라주는 정도? (아...이쯤하면 두달에 한번은 꼬박꼬박 뿌염을 하러 가곤 했던 한국 미용실이 그립다) 더더군다나 뼈아픈 실수로부터 배운대로 웨이브 머리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산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정 견디기가 지저분해지면 추천받은 곳 가서 간단히 긴 머리만 좀 잘라내야지 마음먹고 있었던 내게 ‘웨이브’가 찾아왔다. 아니 왜?


그 어느날의 쫄면 먹방. 제 머리도 ‘파마’가 가능한가요?


정성을 들여서 할 땐 오히려 안 되는 순간들이 있다. 미용실에서 파마를 한 뒤 (펌이라고 표현하려니 왠지 파마같지 않아서 이번 글 안에서는 '파마'라는 단어를 고집하겠다) 늘 스태프 몇 명이 모여들어 내 머리를 배배 꼬아주며 말리는 법을 설명해주지 않던가. 그럴 땐 늘 잘 알겠다고 끄덕거리면서 머리가 고불고불해지는 법을 스스로 시뮬레이션 해보고, 집에가서도 그렇게 똑같이 해야지 만족스럽게 학습해내곤 했다. 컬이 오래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컬크림도 제법 비싼 돈 들여 사고 꼬박꼬박 잘 발라야겠다고 다짐. 미용실에 다녀온 뒤 며칠 간은 어디 알 수없는나라 공주라도 된 듯이 잔뜩 힘을 주고 앉아서 머리를 배배 꼬며 말린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 워낙에 파마가 잘 안나오는 머리라는 것을 여러 번 몸소 체험해 본 바로는 나의 경우,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곱슬슬 탱글탱글한 머리, 소위 '탱글력'은 흐리멍텅하게 금세 사라져버리고 만다. "미용실 가서 뭐했어? 커피만 마시고 왔어?" 숍에 다녀왔다고 말하기가 민망스러울 만큼 파마를 했는지 안했는지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속상할 때도 부지기수. 이쯤하면 파마를 하나 안하나 별 차이가 없어 허무하고, 잡지에 나오는 화보 모델들의 머리는 ‘이건 고데기구나’라고 통감하며 파마웨이브든 고데기웨이브든 그 모든 웨이브를 부러워하는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시간과 돈을 들이고 한동안 과한 노력을 들여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였다. 좀 비싸다 싶은 숍에 가거나 그보다 좀 덜한 숍에 가거나 원체 '안나오는 머리'를 가지고 요리하는 건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종종 생겨주는 웨이브. 한 가닥에 설렜다가 존재감이 옅어지기라도 하면 작은 실망. 너 나랑 썸타는 거니?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생긴 ‘웨이브’란 녀석. 한국에서 가져온 마법의 고데기는 돼지코를 꼽았음에도 작동이 되질 않아서 한 구석에 고스란히 상자채 넣어둔 채 한번도 사용하지 못하고야 말았다. 헤어롤은 가득 챙겨왔으나 저녁에 졸리고 귀찮아서, 아침엔 커피한잔 내려서 뛰어나가기가 바빠서 데굴데굴 굴릴 타이밍을 잡지못했다. 도대체 한동안 그토록 보고싶었던 웨이브는 왜 이제서야 불현듯 등장해준 건지. 좋으면서도 신기했고, 신경쓰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도 무언가가 생길 수 있다는 깨달음은 또 다른 선물같았다. 늘 그렇다. 머리로는 아는데 스스로에게 깨달음을 주는 에피소드가 없으면 가슴에까지는 와닿지 않는 법이니까.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갔다 정도가 싸이스러운 보스턴 날씨. 하루에도 사계절이 다 있는 것 같다고 농담 주고받을 정도.


남편은 변한 ‘기후 탓’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레 추측했고, 나도 살짝은 공감했으나 여전히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한국이랑 비슷한 듯하면서도 날씨의 분위기나 변화의 굴곡이 심한 편이어서 (하루에도 사계절이 다 있는 날씨?) 어느 정도 끄덕여지기는 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순 없겠는데 뭔가 확확 바뀌는 기후 상황-추울땐 너무 춥다가 갑자기 덥고 습하다가- 뭐 그렇다고 한들 이런 급작스러운 변동상황들더불어 그런 기후를 둘러싼 공기의 느낌이 머리카락의 곱슬거림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건가! 이래저래 추측해보다가도 워낙에 웨이브가 없던 머리가 그렇게 소소한 변화 몇가지에 저항 하나 하지 않고 바로바로 곱슬거려줄 수 있다는 게 말이돼? 입술을 씰룩거리며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 추론을 해보다가 이내 거울을 보고 쓱 웃곤했다. “어쨌든 웨이브 머리는 좋아”


애써서 힘을 쓸 땐 잘 안되는데, 집중하지 않고 내버려둘 땐 오히려 되는 일들. 세상엔 생각보다 이런 순간들이 자주 찾아든다. 운동할 때도 많이 듣는소리 중 하나. 힘을 주지 말고 힘을 빼야 한다고. 뭔가를 하고 싶으면 과도하게 긴장해서 하고자 하는 그 ‘목적’지점에 힘을 불어넣지 말고 ‘힘빼기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아나운서 시험을 치를 떄도 잘 되고자 ‘너무’ 노력하면 잘 되지 않았고 에라 모르겠다 맘 편히 될대로 되라지…까지는 아니었지만 세게 몰입이 지나치지 않았을 때 오히려 좋은 결과가 나왔던 것 같다. 실제 생방송도 마찬가지. 잘 진행하려고 노력할 때보다 그냥 툭 놓아두고 슬렁슬렁 진행하며 쓱쓱 진행했을 때 빵빵 터진 그날의 기억들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너무 좋게, 잘 되려고 노력하지 않을 때 나와주는 예상 외의 결과들. 기분좋은 변수들.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찾아들면 100이면 86쯤은 당황을 하는 것도 같지만 이토록 예측치 못한 무언가덕분에 기분이 나아지는 때도 있는 법이군. 예상하지 못한 컬이 찾아와서 신기했고, 덕분에 돈들이지 않고 원하던 효과를 누릴수 있어 경제적이라고도 생각했다. 헤어제품을 바꾼 것도 , 미용기기를 바꾼 것도 아닌데 제 스스로 찾아와준 너란 웨이브, 이쯤하면 생각나는 노래 하나. 정엽이 부릅니다. “왜 이제야 왔니.”

애쓰지 않아도 자동 이뤄지는 일들. 기차가 때되면 기차역에 다다르는 무수한 순간들과도 비슷해서.


이 또한 노력한다고 되는 일은 아닐진대 잠자코 기다려야 하는 순간을 늘려야겠다고 생각해본다. 이 역시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아야 한다’고 쎄게 다짐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어쨌든.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일들도 반드시 있기는 있어야겠다고, 그 여백을 충분히 남겨두는 시간들이 있어야겠다고.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는 날들 (심지어 헤어트리트먼트나 헤어에센스를 충분히 시간들여 정성들여 발라주지도 못하고 있는 요즘 같은 나날들) 에 찾아와준 자연스러운 웨이브, 자연스러운 영감 하나.


빠르게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늘 초조해하는 습성을 지녔다. 필요하면서도 안좋은 습관이라고 늘 체감한다. 영어공부, 미국에 오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진짜 엄청 완전 열심히 하는데, 어느날 한번 삐끗하면 너무너무 속상하고, 왜 내 실력은 수직상승 하는 법이 없는지, 나만 느린 것 같아서 짜증나기가 그지없을 때가 너무 많다. 그럴 때마다 “외국어는 나선형으로 실력이 올라가는 법이야.” 라고 남편이 위로한다. 맞아. 돌고돌기만 하는 것 같아서 속터지더라도 알고보면 둥글게 둥글게 올라가고 있긴 하더라. 그래도 초조하긴 마찬가지. 노력을 많이 하는데 선명하게는 안 보이니까. 매일 제자리에 선 것 같으니까.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상사와의 관계에서든, 친구와의 관계에서든 ‘좋은’ 방향을 설정해두고 너무 힘주고 노력하면 오히려 꼬일 때가 많고 서운한 지점이 생겨서 결국엔 스스로 지치고 포기하는 순간들이 제법 있었지 않았나.


‘냅두면 자연스레 해결되고 어쩌면 더 잘 될 일들을’ (놔두지 말고 탁! 냅두는 게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어쩌면 먼저 한 발 앞서서 소금을 뿌리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스스로는 ‘슈가파우더’를 뿌리고 있다고 자체 코스프레 하면서. 그래서 안달하며 첨가하는 만큼 내일은 더 달콤한 결과가 찾아들 거라고 착각하면서. 내버려두면 본연의 것에서 단 즙이 배어나와서 달아지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요소로 척척 숙성이 되어 좋아질 수도 있는 것들에 나는 ‘필요없는 몸짓’을 내내 보이고 있었을는지도.


냅두면(?) 자연히 무르익어서 원하던 그림이 나타나 줄 수도 있는 법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천천히 다가와 준 그 무언가의 ‘웨이브’처럼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뭐, 딱히 기대라는 것도 하지 않았는데 찾아와주는 그 무언가의 존재들 – 이를테면 남편과의 사랑? – 예상하지 못했다가 불쑥 나타나 준 그것들이 내내 초조해하면서 만들어 낸 내 마음의 서툰 균열들을 조금씩 감싸주기를 바라며.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수직으로 쭉쭉뻗어있는 것만 같던 너의 머리들도 종종 웨이브를 보여주던 걸.
제 알아서 피어나는 순간들. 애쓰지않아도 돼.웨이브가 만들어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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