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수가 낮은 안경

by ENOCH 박두일


90년대 초 간호대학을 다닐 때였다. 나는 병원에 실습 나가는 것이 그렇게 싫었다. 여자들 틈에 낀 남자 간호학생들은 남의눈을 피할 수 없었는데, 입고 간 실습복까지 특이했다. 다른 의료인들은 입지 않는 디자인이었는데 얼핏 보면 요리사복 하고도 비슷하여 선배들은 실습하러 가면 “짜장면 저기다 놓고 가”라며 놀렸다. 의료인의 포스보다는 춘장 냄새나는 중국집 일꾼처럼 보였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그 옷을 입고 병원에 실습을 가라 하면 줄행랑을 칠 것 같다.

그날은 분만실 실습 중이었다. 당시에는 신생아와 산모가 아무리 건강해도 서로 격리시켜 며칠을 보내게 했는데, 마치 투명한 벽 너머의 사랑을 연습하는 것 같았다. 산모들은 하루에 몇 번씩 유리창 너머로 아기를 바라보다가, 아쉬움을 가득 안고 병실로 돌아가곤 했다. 마치 미술관의 걸작을 감상하듯, 오직 눈으로만 아이를 담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한 아기가 기억에 남는다. 왼쪽 귓불 위쪽에 새끼손가락만 한 작은 혹을 달고 태어난 아기였다. 그것 말고는 너무나 건강한 아이였는데, 마치 몸에 작은 액세서리를 달고 나온 듯했다. 아이의 엄마가 아기를 보러 와서는 간호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아이 귀에 붙어있는 혹은 언제 뗄 수 있을까요?"

애기 엄마의 목소리는 이미 울음이 섞여 있었다. 아마 출산 후 호르몬의 격랑 속에서 아이의 작은 혹이 태풍의 눈처럼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간호사는 무심하게 말했다.

"액세서리요? 퇴원하고 몇 개월 지나 수술하면 될 거예요."

산모는 눈물을 훔치며 울먹였다.

"액세서리라고요? 장난하지 마시고요…"

간호사는 다시금 얼음장 같은 어조로 말했다.

"액세서리는 의학용어예요! 불필요한 것을 저렇게 달고 태어나는데 의학적으로 그렇게 부르죠."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영어로 그런 작은 혹은 정말 ‘accessory’라고 불렸다. 하지만 산모는 자신이 조롱당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이의 작은 혹 때문에 이미 마음이 실타래처럼 엉킨 산모에게, 그 단어는 아마도 가시 돋친 농담처럼 들렸을 테다.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줄 다른 표현은 없었을까?




미묘한 단어의 의미에 따라 마음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경험을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지난 4월 한국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한국에 가면 의례적으로 하는 일 중 하나가 안경을 맞추는 것이다. 이곳 미국보다 훨씬 저렴하고 빠르니, 마치 시간과 돈을 동시에 절약하는 마법과 같다. 원주 이마트 2층에 있는 안경점에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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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오셨어요?"

30대 후반쯤 보이는 남자 주인이 물었다.

"예…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안경은 아니고, 집에서 책 읽을 때 쓰는 안경 하나 맞추고 싶어서 왔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몸에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들이 찾아오는데, 그중 하나가 눈이 빨리 피곤해진다는 점이다. 책을 읽을 때는 도수가 낮은 안경이 필수가 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안경을 갈아 쓴다. 운전할 때 쓰는 이중초점 안경, 일상에서 쓰는 다초점 안경, 그리고 책 읽을 때 쓰는 ‘도수가 낮은 안경’.


그런데 주인장이 이렇게 말했다.

"아, 돋보기요?"

돋보기라니. 그건 팔십 먹은 아버지가 쓰는 것이고, 나는 그저 '도수가 낮은 안경'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돋보기 말고요. 그냥 도수가 낮은 안경이요. 책 읽을 때 쓰는…"

주인장은 내 말을 끊으면서 말했다.

"그걸 돋보기라고 불러요."

"..."


쩝. '도수가 낮은 안경'과 '돋보기'는 완전히 다른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도수가 낮은 안경'은 나처럼 '젊은' 사람이 쓰는 것이고, '돋보기'는 '늙은이'들이 쓰는 것이라고.

50대는 자신이 늙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바람을 잘 피운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물론 바람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날 안경점에서 나는 점점 늙어가는 자신의 몸뚱이를 부정하고 싶은 50대 남자가 되어 약간의 충격을 받고 멍하니 서 있었다. 아마도 내 영혼은 잠시 젊음의 환영 속을 헤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진부한 클리셰가 있다. 나이 듦은 누구도 피할 수 없으니 즐길 수밖에. 덤덤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맞이하듯 말이다. 나이 듦을 잊어버리고 보람된 일에 집중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허물어져가는 겉모습이라는 껍데기보다는, 점점 더 아름답게 변해갈 수 있는 내면이라는 정원을 가꾸는 일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상대방이 거북해하는 나의 말은 무엇인지 돌아보며, 좀 더 성숙한 언어의 건축가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어쩌면 모든 단어 속에는 보이지 않는 가시가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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