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지성 호우와 시내버스
나른한 일요일 오후 길을 나섰다. 출발지는 한선아파트, 도착지는 만복 아파트다. 주말에도 봉사의 마음으로 회사로 나가야 하는 그에게 달콤한 델리만쥬 한 상자를 사서 가려던 길이었다. 걸어 나올 때 하늘이 우중충해지는 것이 심상치 않더니 디저트 가게에서 주문한 빵이 노릇하게 구워지는 사이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은 있었지만 큰일이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더구나 코로나 이후 아이와 대중교통은 처음이었다. 비가 조금 잦아들 때 지금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장님께서는 곰 모양의 만쥬 옆에 붙은 것을 가위로 하나하나 예쁘게 자르고 계셨다. 눈앞에서 두어 대의 버스가 가게 앞을 지나갔다. 좁고 습한 가게 밖 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건네받은 디저트 상자와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을 아이와 나누어 들고 쏟아지는 비를 우산으로 막으며 버스정류장을 향해 달렸다. 구두 안으로 튕기는 빗물이 계속 들어왔다. 우산을 접고 허둥지둥 정류장에 앉으니 지나가는 차들이 거대한 물파도를 일으켜 입고 있던 하얀 치마에 3연속으로 튕기자 바람과 공기가 통하지 않는 더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꽤나 오래 덥고 습한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으니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를 세우기도 전에 탈 준비를 하고 있다가 멈추자마자 아이와 차례로 뛰어올랐다. 아이는 기사님 바로 뒷좌석에 앉았고 후불교통카드가 되는 신용카드를 버스를 타기 전부터 꺼내어 들고 있었지만 어쩔 줄 몰라 버벅거렸다. 기사님께서 “그냥 기계에 카드를 가만히 갖다 대면 알아서 다 결재됩니다.”라고 알려주셨다. 미취학 아동은 별도로 버스비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카드를 지갑에 다시 넣고 아이의 뒷자리에 앉았다. 폭우는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염없이 쏟아지고 버스는 계속 덜컹거렸다. 그래도 버스는 한산했고 에어컨은 아주 쾌적했다.
원문 고개를 지나 무전동 대로변을 통과해 롯데마트 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 받을 때부터 창 밖으로 밝음이 느껴졌다. 보건소를 지나 시청 언덕을 오를 땐 해가 나고 비도 오고 이상스러웠는데 중앙시장을 지날 때 사람들은 우산을 접고 활기차게 걷고 있었다.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버스에 타서 이렇게 시시각각 바뀌는 날씨를 구경하다가 변화 구간마다 핸드폰을 꺼내어 영상으로 담았다. 어느새 목적지에 가까워진 서호시장에 이르러서 승객을 내려준 버스가 다른 정류장 정거 때와 다르게 곧바로 출발을 하지 않았다. 기사님께서 뒤돌아보며 우리에게 말을 거셨다.
“여기 종점인데요. 어디 갈라고 버스 탔습니까?”
“아, 여기가 끝이에요?”
“버스 앞에 딱 ‘서호시장’이라고 쓰여있다 아입니까? 어데 갈낀데요?”
“우리는 도천동 가려고 탔는데...”
“나는 요 앞에서 좀 있다가 안정 지나서 황리까지 다시 가야 되는데... 그래도 비 그쳤으니까 살살 걸어가보이소. 요 앞에서 앞문으로 내리면 됩니다.”
“네. 고맙습니다. 기사님.”
버스에 앉아서 바깥을 보니 운전할 때와 다르게 보이는 것이 많았다. 금방 갈 곳을 돌아 돌아가는 버스는 무언가 아주 불편했지만 정류장 안내와 함께 이따금씩 반복해서 알려주는 코로나19 버스 탑승 수칙과 귀 기울여야 들을 수 있는 라디오 소리, 누군가는 태우고 누군가는 내려주기 위해서 계속 달리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는 버스의 고된 일을 보면서 나는 가만히 바깥 풍경만 보아도 되고 보고 싶은 책을 읽어도 되는 것이 고맙고 신기했다.
버스를 타고 또 내려 걸으면서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인지 허기지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만쥬를 건네고 잠시 앉아 있다가 시간이 조금 더 오래 걸릴 것 같아 근처에 있는 공원 내 작은 카페로 갔다.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아이는 생크림과 딸기잼 얹어주는 저렴한 스콘을 하나 주문했다. 조금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니 일을 마친 남편이 왔다. 스콘은 숟가락을 달달 긁어먹고 채 식지 않은 내 커피를 챙겨서 큰아이를 데리러 차에 올랐다. CD 플레이어가 재생 중이었다. 그런 것이 아직도 작동하는 오래된 낡은 차였다. 흘러나오는 곡은 토이의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이었다. 서호시장 종점에서 한 정거장 더 걸어가야 했던 그때, 이 장대비가 내렸더라면 이 곡을 들으면서 차창 밖 비를 보며 이런 부드러운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거짓말같이 맑아졌다가 이내 곧 다시 어두워져 잔잔한 빗줄기를 뿌리고 다시 돌변해서 이렇게 폭우를 쏟아내는데 이런 날씨를 겪어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가끔은 내 마음도 이렇게 요상한 날씨처럼 바쁘게 요동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한편 이런 생각도 했다.
'여기선 이렇게 폭우가, 저기선 아무렇지 않은 듯 해맑게, 그 중간에는 뒤섞인 이상한 하늘이 펼쳐지는 건 이상하거나 무언가 엉망이어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감정과 날씨는 둘 다 살아있어 상황에 따라 자주 변하는 날 것 그대로의 것이니까.'
길을 돌고 돌아 그래도 버스를 타는 것보다는 빨라 해 질 녘에 집으로 돌아왔다. 베란다 앞으로 보이는 하늘에 예쁜 무지개가 걸렸다. 변덕이 요동치던 끝에 이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려고 그랬나 싶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