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한 책 선물을 보낸 사람은 누구였을까?
갑자기 아이가 책을 사달라고 했다. 허구한 날 놀이터에 나가 놀거나 쪼그리고 앉아 만화책만 보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글밥 책이 읽고 싶다고 했다.
“엄마, 나 <똥볶이 할멈> 읽고 싶은데, 사 주세요.”
‘이상하고 수상하다. 무슨 책이길래 별안간 글밥 책을 읽고 싶다는 걸까?’
“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이틀 정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으니까, 엄마가 출장 간 김에 서점에 들러서 바로 사 올게.”
그리고 지난 금요일 오후 나는 1박 2일 직무 연수를 위해 인근 중소도시로 떠났다. 그런데 일정이 빠듯했다. 강의와 답사, 체험이 빼곡하게 짜인 연수를 마치니 복잡한 곳에 다시 들어갈 힘이 없었다. 서점에 못 들를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며 남편에게 이런 상황을 말하니, 괜찮다고 했다. 아이들 주려고 인터넷서점에서 주문한 책이 월요일쯤 도착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싸늘해진 공기와 따뜻한 햇살, 나른한 몸, 집에서 넷플릭스와 함께 뒹굴 거리기 딱인 일요일이 지났다. 한 주간 가장 치열한 월요일을 보내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저녁 식탁에 앉을 때였다. 퇴근한 아빠 손에는 서류 봉투 두 개가 들려 있었고, 각각 책 주인을 찾아갔다. 봉투를 연 아이들 반응이 묘했다. 좋아하는 듯하면서도 ‘굳이 왜 이런 책을?’이라는 표정 같기도 하면서, 박수는 치는데 눈은 웃지 않고 “고맙습니다.” 하고 형식으로 말 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책을 읽고 싶었던 아이에게 들려진 책은 바로 <정브르가 알려주는 곤충 체험 백과>였다. 아이가 좋아하는 유튜버의 책이었다. 집에서 사슴벌레 성충 교미에 성공해 십수마리의 애벌레를 키우고 있는 터라 도움이 되는 내용이 분명 많았다. 한 이틀이 지나자 그 책을 여러 번 읽은 아이는 다시 그 <똥볶이 할멈>이 언제 집에 오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책은 장바구니에 담긴 그대로였다. 아무 날도 아닌데 아빠가 책을 사 주었으니, 크리스마스 즈음에 선물로 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계속 책이 언제 오냐고 묻고, 샀느냐고 묻고, 그렇게 나를 열심히 채근했다. 결국 어제저녁 식탁에서 나는 내가 읽고 싶은 책 한 권과 함께 주문 및 결재까지 완료했다. 저녁 늦게 주문했으니 빠르면 내일 퇴근 무렵에 올 것이고 늦어도 금요일 안에는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점심시간, 책이 출발하고 곧 도착한다는 알림이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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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쏟아지는 피로감에 어질 했지만 퇴근은 즐겁다. 내일 하루만 버티면 다시 나른한 주말이 올 테니, 피곤한 얼굴이지만 기쁜 마음으로 교무실을 나서 중앙 현관에 있는 택배물품을 두는 곳으로 갔다. 훈민정음 나무에 근처에 초록색 작은 새가 앉아 있는 큰 박스가 있었다. 받는분에 이름 가운데에 *표시로 되어 있었지만 분명 내 이름이었다. 인터넷서점 배송이 정말 빠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아이가 그토록 바라던 <똥볶이 할멈>이 대체 어떤 책인지 궁금해서 가슴이 뛰기까지 했다. 빨리 박스를 열어보려고 서둘러 내 차 운전석으로 가서 앉았다. 차분히 앉아 박스를 열기 전 택배 운송장을 보니 이름 옆이 조금 이상했다.(주문자 강*규)라고 적혀 있었다. 분명 내 이름인데 주문자가 따로 있고, 나는 예스24로 주문했는데 왜 교보문고 상자로 택배가 왔을까? 기이하다. 덜컹 박스를 열어보았다. 두 권의 책을 시켰다기에는 너무 큰 박스도 이상했는데 비닐을 살짝 뜯으니 책은 세 권이다. 앗. 평소에 잘 보지 않는 주문서를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주문자가 강신규 씨다. 나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그 사람이 주문을 해서 우리 집이 아닌 학교로 책을 세 권이나 보냈다. 내가 우리 학교에 근무하는 것을 아는 사람인데, 나는 이 사람을 모른다. 나한테 이 사람이 책을 왜 보냈을까? 주문 내역을 읽어 보았다.
- 정유정 <완전한 행복>
- 최은영 <밝은 밤>
- 매트 헤이그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읽고 싶다. 열어보고 싶다. 당장 비닐을 뜯고 책의 목차를 살피고 싶었지만, 이성적으로 다시 생각을 해보니, 결국 잘못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544-1900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책은 내게 왔는데 모르는 사람이 잘못 보낸 것 같다고. 아마도 주문인 개인 정보라 내게 번호를 알려주시지 못하니, 그분께 내게 책을 잘못 보냈다고 확인 부탁한다고 하고 통화를 마쳤다. 운전을 해서 집으로 왔다. 읽고 싶은 책들인데, 아쉽다. 그래도 마음이 찜찜한 것보다야 그것이 깔끔한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도착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나는 한참이나 검색과 생각을 더했다. 최근에 교직원 공제회에서 실시한 도서 증정 이벤트에서 신청해서 온 것인가 확인했는데 그건 1인당 1권만 주는 행사였고, 발표일이 11월 25일이었다. 신청도서에 나는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선택했었다. 다음으로 최근 통화를 하게 된 ‘창원도서관’을 떠올렸다. 별도 부상이 없었는데, 수상자에게 상품으로 도서를 발송한 거냐고 물었더니 그렇게라도 상품을 드렸으면 좋겠는데 미안하게도 예산이 없다며, 도서관에서 보낸 게 아니라고 죄송하다고 하셨다.
‘강신규 씨는 도대체 누구시길래 내게 책을 보내셨을까?’
답을 찾을 수 없었고, 아마도 오배송이 확실한 것 같았다. 내일 다시 반품해야 하니 번거롭게 집에 들고 갈 필요 없이 그냥 조수석 자리 그대로 두기로 했다. 집으로 오기 전 오늘 저녁 메뉴로 포장해 온 반조리 부대찌개 봉지를 챙겨 집으로 올라왔다. 앞치마를 서둘러 메고 쌀을 씻어 밥솥에 취사 버튼을 눌렀다. 냄비에 육수를 붓고 비닐을 뜯어 재료 넣고 끓였다. 부대찌개가 알아서 끓는 동안 주방을 정리하고 오늘 공강 틈틈이 읽던 김신회 작가의 <아무튼, 여름>을 마저 읽었다. 유쾌한 그녀였다. 여름을 사랑하고, 여름의 맥주를 사랑하고, 결핍을 채우려 부지런히 여름휴가를 가고, 수영은 못하면서 늘 물놀이를 즐기며, 나에게 집중할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그 어귀에는 늘 친구가 있었다. 그녀의 도피이자 여행에는 친구나 후배들이 있었는데, 대화에서 -영으로 마무리하는 애교 가득한 -영체가 신박했고 글을 읽는 내내 키득거려졌다. 갑자기 대학교 언니들이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학번 높은 여자 선배, 우리 언니들. 키득거리면서 밤을 새우고 떠들고 놀 수 있는 언니들과 나도 서울이든 괌이든 발리의 우붓이든 어디든 갑자기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책은 벌써 마지막 문장이 되어버렸고, 부대찌개는 팔팔 끓었다. 불을 끄고, 남편이 올 때쯤 라면사리를 넣어 식사를 하면 될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다 정리되고 여유가 생기자 다시 강신규 씨가 떠올랐다. 인터넷에 검색을 한번 해보았다. 영화감독, 변호사, 작가, 한화운용 매니저 등등 다 모르는 사람 일색이었다.
‘혹시 싱? 싱은 아니겠지?’ 하며 누군가를 떠올렸는데 남편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계란 노른자를 반숙으로 해서 1인당 하나씩 먹도록 4개를 구웠다. 라면 사리를 넣고 다시 부대찌개를 데웠고 네 공기의 밥을 떴다.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게 밥을 먹었다. 김치와 김, 계란 프라이와 부대찌개가 전부였지만 정말 맛있었다. 부대찌개, 오늘 저녁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엄마, 오늘 책 왔어?”
“아니, 오긴 왔는데 아마 잘못 와서 다시 보내야 해. 지원이 책은 아마 내일 올 것 같아.”
“에이, 아쉽다.”
‘아쉽기는 내가 제일 아쉽지. 읽고 싶은데, 읽고 싶은 책인데…”
그때였다. 멀리서 카톡 알람이 울렸다.
아까, 같이 여행을 가고 싶어 떠올렸던 언니였다. 바로 밍 언니. 불현듯 떠올렸던 밍 언니의 남편 싱까지.
언니가 갑자기 무슨 일일까? 궁금해서 바로 확인을 했다.
[쑥아, 학교로 책 보냈어! 오늘 저녁에 도착했나 봐 ^ ^ 나도 아직 뭐가 재밌는지 몰라서, 젤 사고 싶었던 걸로 보냈어]
[진짜 부대찌개 다 먹고 나니 빨간 국물 향과 같이 밀려오는 감동… 로맨틱하다. 강신규 씨… 이름으로 온 책들]
[ㅋㅋㅋ내가 보냈거든ㅋㅋㅋ강신규 씨는 아는 게 없어 ㅋㅋ, 네가 좋아하니 나는 더 기분 좋아]
[반은 설레고 반은 반품해야 하는 아쉬움에 조수석에 두고 집에 왔는데… 찐 로맨틱해… 오늘 김신회 작가의 <아무튼, 여름> 에세이 읽다가 언니랑 같이 철저하게 여름의 나라로, 서울로, 어디든 여행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통했어. 마음이, ]
[그런 날이 올까? ㅎㅎㅎ 생각만 해도 므훗,]
그렇게 강신규 씨가 보낸 책 세 권의 실체를 파악했다. 결국 내게 온 책들이었다. 책과 함께 그 마음도 함께 받았고, ‘싱’으로만 듣던 형부의 이름이 강신규 씨였다는 것을 다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떠올려보면 언니는 참 감정이 크고 넓은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에 한 번도 부모님 속을 썩여 본 적이 없던 그야말로 모범생이었던 나는 대학교에 오자마자 지독한 사춘기를 보냈다. 한 여름의 열병과도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 감정이 오르내렸고 모든 것을 내 밖으로 다 드러내곤 했다. 분명 웃고 있었는데 속으로 울고 있었고 들떠서 누구보다 신나 보였지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침울했다. 스무 살의 나 스스로 감당되지 않던 자유와 즉흥, 그리고 내 감정.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렇게 불나방처럼 보내지 않을까 생각이 들지만 그럴 때, 그렇게 널을 뛰는 나를 따뜻하고 귀엽게 바라보며 다독여주던 밍언니가 생각난다. 그래 봐야 나보다 고작 두 살 많은데, 언니는 한참이나 큰 사람 같았다. 좋은 사람을 떠올리면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부끄러운 스무 살의 나를 떠올려서 그런지, 김신회 작가가 말하는 여름이 그때의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도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여름날의 추억이 있다.
여름이 그 추억만큼 나를 키운 것이다.
여름은 담대하고, 뜨겁고, 즉흥적이고, 빠르고, 그러면서도 느긋하고 너그럽게 나를 지켜봐 준다.
그래서 좋다. 마냥 아이 같다가도 결국은 어른스러운 계절, 내가 되고 싶은 사람도 여름 같은 사람이다.
- 김신회 <아무튼, 여름>
차분히 책을 읽을수록 새로운 무엇을 찾아 나아가게 된다. 그런 내게 언니는 스스로 읽고 싶은 궁금한 책들을 나랑 같이 읽자고 선물했고 나는 마음이 터질 듯 행복했다. 언니는 나의 스무 살 가을에도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였던가 아무튼, 당시 엄청 고심해서 고른 의미있는 책을 선물해 주었었다.(제목도 확실치 않을 걸 보면 자취방 책 꽂이에 예쁘게 진열만 잘 해둔 것도 같다.) 그리고 15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내게 마음을 주고 있다니, 아까 너무 감동이 밀려와서 제대로 말 못 했는데… 이 마음, 나중에 꼭 잘 전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새벽잠을 미루고 글을 쓴다.
“언니, 정말 고마워. 늘, 언니 마음 어딘가에 내가 한 번씩 떠오를 수 있어서, 내 마음 어딘가에서도 언니가 불쑥불쑥 찾아오기도 해서. 한번씩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기도 한데, 아무튼 너무 보고 싶어. 우리 겨울에 꼭 여행가자. 겨울 여행.”
글을 쓰고 나니 이런 생각이 밀려든다. 철없던 시절의 무수한 흑역사들과 함께 나도 어느덧 여름스러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