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무구

언젠가 궁극의 무공을 갖게 되는 날을 꿈꾸며

by 경계인

10대에 읽은 책은 그 사람의 감성을 평생 좌우한다고 하는데 저의 경우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시절에 열심히 읽은 책, 감명깊은 부분은 지금도 제가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이나 감수성을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제가 열심히 읽은 책은 김용의 무협지였고 특히 고려원에서 나온 3부작을 수십번 읽었습니다. 제일 좋아한 시리즈는 의천도룡기(당시엔 영웅문 3부)였지만 사조영웅전이나 신조협려도 좋아했습니다. 다만 너무 빠지는게 무서워 다른 무협지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무협지의 주인공들은 보통 어린 시절 고난을 겪고 우연히 기인을 만나 절세의 무공을 얻게 되고 역경을 헤치고 위국위민 협지대사같은 위대한 인물이 되는 영웅서사와 거의 동일한 서사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너가 무슨 영웅이냐고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겠지만, 누구나 자신의 삶은 뭔가 드라마틱하고 역경과 갈등을 겪어 종국에는 꿈을 이루리라고 믿고 싶듯이 저도 그냥 그런 상상을 자유로이 할 뿐이니 그냥 생각하는 그대로 말씀드릴 뿐입니다. 더구나 저는 최근 몇년간 너무 극적인 일을 겪다 보니 다소 늦은 나이에 그나마 무협지의 주인공으로 빙의해서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시간을 잠시 잊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여하튼, 그 의천도룡기의 주인공인 장무기는 우연한 기회에 심오한 내공심법인 구양신공을 익혔지만 그건 스스로 익힌 것일 뿐 아직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설부득이란 사람이 갖고 있던 이상한 포대인 건곤일기대에 갇혔다가 역시 우연한 일로 마지막 관문을 뚫고 구양신공을 연성하게 됩니다. 저는 저 역시 늦었지만 건곤일기대에 갇혔던 일을 기회로 저의 내공이 완성되었으면 합니다. 군생활 합쳐 20년 정도 공무원으로 일했고 부분부분 어지간한 일은 다 해 본 듯하면서도 여전히 전 스스로 부족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자신이 세운 스스로의 기준, 독단으로 내가 일하는 방식, 결과물의 완성도를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연차이지만 여전히 완급, 고하 조절이 잘 안되거나 엉뚱한 접근방식을 택하기도 해서 늘 최종적으로 내 역량이 하나로 꿰어지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감사원이나 검찰에서 조사를 받거나 법정에서 증언할 때도 비슷합니다. 사실 이런 걸 오랜 기간, 여러 번에 걸쳐 받아보니 내가 무언가를 감추거나 속이려는 게 아닌 한 위축될 필요도, 긴장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실제로도 전 아는 건 아는 대로,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거의 다 답했다고 생각합니다. 검사나 감사관도 비공식적으로는 그와 비슷한 평가를 이야기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감사, 수사, 신문 과정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를 가리기 위한 것이고 특히나 물어보고 나서 듣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나 혹은 누군가가 법을 어겼다고 확신을 갖고 묻는 사람에게는 그 무슨 말을 해도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을 하든 원하는 답만 선택적으로 가져가기도 하고요. 그럴 때는 늘 사람인지라 화를 내고 소리도 지르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그러는 것도 공통적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럴 땐 마음속으로 장무기가 멸절사태와 맞서는 장면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장무기는 멸절사태와 맞설 때 불광보조라는 아미구양공 기반의 무공에 그 본류에 해당하는 구양신공의 한 구절 '상대가 아무리 흉포하더라도 나는 한 모금의 진기로 충분하다'는 대목을 떠올립니다. 결국 멸절사태의 아미구양공은 본류인 구양신공에 스며들어 아무런 화를 입히지 못합니다. 강이 바다에 흘러들어가듯이요.


한편, 거지들의 조직인 개방은 항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이라는 핵심 무공을 방주에게 전수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사조영웅전에서는 홍칠공이 주역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창안한 것이 항룡십팔장이라고 하는데, 항룡유회, 잠룡물용, 현룡재전같은 주역의 괘는 어릴 때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뭔가 있어 보이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좀 후졌지만 더 개방스러운 무공은 타구봉법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자 그대로 개를 때리는 봉법이니 구걸하는 거지들에게는 현실세계에서 늘 맞부딪히는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방 방주의 신물은 타구봉이고 타구봉법은 오직 방주에서 방주로만 구결로 전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조협려에 보면 천하오절 중 2인인 홍칠공과 구양봉이 말년에 화산에서 겨루다 더 이상 기력이 없어 무공초식으로 다투는데 구양봉이 타구봉법의 마지막 초식에서는 대응방법을 못 찾다가 결국 찾아내기는 하는데 그 마지막 초식의 이름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천하무구(天下無狗)'가 그 마지막 초식입니다. 이 초식을 쓰면 더 이상 개는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지금은 이렇게 찌그러져 있지만, 언젠가는 천하무구 같은 궁극의 무공을 완성하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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