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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사장 Apr 07. 2024

나를 정의하는 필모그래피

기록을 통한 기억, 기억을 통한 의미, 의미를 통한 정의

네이버 어학사전에 '필모그래피(filmography)'를 검색하면 '감독, 촬영자, 배우, 주제 따위로 분류하여 정리하여 놓은 영화 작품 목록'이라는 정의가 나온다. 보통 '필모그래피' 하면 배우의 출연작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는 필모그래피는 단순한 의미로 차용함을 넘어 범용적인 광의의 개념으로 개인적 차원에 적용하고자 한다.


왜 필모그래피를 말하는가?


보통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자문(自問)은 물론이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혹은 "당신은 어떠한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형태를 생각해보자. 나아가 '우리(공동체)를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라는 폭넓은 의문에 이르기까지 어떤 대상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그를 구성하는 생물학적, 물리적, 화학적 요인을 분석하여 객관적이고 명징한 정답을 내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가 말하는 '어떠한 대상(사람)의 정의'는 과학적으로 규정하자는 화두가 아닌 인문학적인 통찰이며 철학적이기까지 한 작업이다. 여기서 필모그래피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한 개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그 사람을 정의해볼 수 있는 의미있는 작업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다.


어떻게 필모그래피를 활용하는가?


배우에게 필모그래피가 출연한 작품과 맡았던 역할이라면, 직장인에게 필모그래피는 다녔던 회사와 담당했던 직무로 볼 수 있다. 대학생에게 필모그래피는 단순히 소속 학교와 전공이 아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활동했던 동아리는 물론이고 어떤 친구들과 어디를 가서 무엇을 했는지까지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한 개인의 필모그래피는 그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과 기억의 집합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학교 안에서 들었던 모든 특강은 물론이고, 학교 밖에서 활동했던 일련의 내용들을 기록했다. 나의 필모그래피라 할 수 있다. 취업하기 위해 지원했던 회사까지 모두 기록했다. 그와 별개로 매년 10년 넘게 연말이면 그 해에 있었던 나만의 주요 사건을 추려서 정리한다. 그야말로 나에 대해 치밀하게 기억을 남겼던 작업을 해왔다.


20대에 국한해서 필자라는 사람을 돌이켜봤다. 20대의 나를 정의해보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합리적이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20대를 돌이켜보면 대표적으로 대학생 때 학교말고 참으로 많은 곳에 소속되었다. 대체로 기업체에서 대학생들을 모집해 활동하는 대외활동을 참으로 많이 했었다. 특정 업체의 상품과 서비스를 홍보하는데 일조하는 홍보대사 내지 서포터즈 활동도 여럿 했었고, 대학생 기자단으로 소속 기관의 콘텐츠를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증빙이 가능한 활동을 추려보니 얼추 서른 개는 족히 넘었다.


뿐만 아니라 외부 교육은 물론이고 교내에서 받은 교육프로그램도 살펴봤고, 언제 어떤 내용으로 장학금을 받았으며, 언제 어디서 어떤 봉사활동들을 했었는지도 샅샅이 살펴봤다. 총체적으로 나의 필모그래피를 살피는 과정은 결국 과거의 족적을 통해 나를 정의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이렇게 필모그래피를 리뷰하고 의미를 도출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기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억은 잊혀지고 사라진다. 나에 대한 기억은 두뇌에 의지할 수 없고, 의지해서도 안된다. 분명히 기록해야 한다. 기록을 통해 기억할 수 있고, 기억을 통해 의미를 반추할 수 있으며, 찾아낸 의미를 통해 정의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기를 쓰는 게 가장 좋은 필모그래피 기록 방법이지만 일기를 쓰지 않더라도 본인의 학교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개인생활을 모두 별도로 구체적으로 메모해둔다면 분명 쓸모있는 필모그래피가 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어떤 형태와 형식으로든 자신을 기록하는 행위다. 자신을 기록해야 자신을 들여다보고 알 수 있다.


어떤 필모그래피를 봐야하는가?


단순히 소속과 그 안에서 했던 일들만 기록하는 것은 부족하다. 이왕이면 특정한 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과 생각까지 적어야 의미있는 필모그래피를 완성할 수 있다. 그렇게 차곡차곡 포개진 필모그래피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나아가 전체적으로 조망했을 때 그것들을 관통하는 가치있는 정의가 가능하다. 다시 필자의 필모그래피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는 헌혈을 비롯해서 대학 시절 봉사활동들을 참으로 많이 했었다. 아마 학창 시절 한 기업으로부터 받았던 장학금 수혜에 대한 부채의식도 한 몫 했을 것이고, 대학생이었던 시기에만 국한해서 보더라도 그 때 받았던 많은 혜택과 기회들을 사회적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내재된 의도도 원동력으로 작용했으리라.


유난히 많은 특강들을 수강했던 이력도 나름 의미있게 포착된다. 취업특강은 기본이고, 전문가 또는 유명인사가 연사로 나오는 강의라면 교통비를 아까지 않고 달려갔다. 교내 특강은 섭렵했다는 표현이 적확할 정도로 전공과 교양 수업시간 외에는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찾아 들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불린 이어령 선생님 특강을 듣고 난 후에는 돌아가시는 길에 같이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다시 봐도 흐뭇하다.


별의별 강의를 다 들었다. 전공과 관련된 세미나에 대학생 자격으로 신청해서 가질 않았나, 자기개발과 관련된 강의도 열심히 찾아갔다.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는 실무자의 이야기를 찾아가 듣기도 했다. 다시 보니 공부는 언제하고 연애는 언제했나 싶다. 그래도 할건 다하면서 놀기까지 했으니 나의 20대는 참으로 채우기 바쁜 하루하루였다.


모든 필모그래피는 쓸모가 있다. 내가 가치있다고 선택한 일련의 모든 활동들은 나를 규정한다. 내가 의미있다고 여긴 이성과 감정의 결과물이 곧 내가 머물렀던 곳에서 했던 일들이다. 따라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까지는 아니더라도 큼지막한 필모그래피는 기록해두어야 한다. 어느 시점엔 나를 돌이켜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문득 궁금해질 무렵 해답은 아니어도 어렴풋한 실마리는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바쁘게 지낸 20대에 기록의 중요성을 알고 틈틈이 일상의 모든 것들을 기록한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필모그래피를 어디에 써먹는가?


이래저래 모인 필모그래피는 관통하는 하나의 나로 모인다. 온갖 배움에 갈망하며 교육을 찾아다니고, 많은 봉사활동들을 통해 사회에 이로운 영향을 주고 받으려고 애쓰고, 앞날이 걱정되어 취업 관련 활동에 유난히 에너지를 많이 쏟으며 부던히 애썼던 20대의 나를 통해 지금의 나를 본다. 나를 정의하기 위해 살펴봤던 필모그래피는 스스로에게 잘 살아왔다는 위로와 격려가 우선임을 말해준다.


지금까지 애썼다.

그 때는 젊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에너지가 넘치던 시절이었다 하더라도 세상과 나를 이해하기 위해 보다 더 가치있는 일을 하려고 애쓰던 내가 나를 성숙하게 만들었다. 


나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나름 20대의 내 자신을 이렇게 정의해봤다.

'부족하지만 누구보다 주어진 여건에서 스스로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에 이로운 영향을 끼치며 세상에서 나를 증명하며 살아오며 부던히 세상과 나를 알아가려고 치열하게 애쓰는 사람' (막상 정의해보니 쓸떼없이 장엄하기까지 하다. 앞으론 카피라이터처럼 더 간결하고 명료하면서 함축할 수 있는 정의를 해봐야겠다)


누가 필모그래피를 쓰고 살펴야하는가?


물론 목사님, 스님, 신부님처럼 특수한 직업군의 경우 그 직업 자체가 굳이 필모그래피를 살펴보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대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름의 필모그래피를 정리하고 살핀다면 분명 의미있는 발견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같은 스님이라 하더라도 각기 다른 개성과 지향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서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기록해야 한다. 누구도 해주지 않는 나를 기록하는 작업이다. 나의 필모그래피는 과거의 나를 추억하고, 현재의 나를 이해하고, 미래의 나를 설계하는데 도움이 된다. 모두에게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기록하고 정리하여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삶을 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알기 위해서라도 삶의 단서들을 챙기라고 당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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