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

by 브론치

인생의 중대한 선택 앞에 서면 사람들은 흔히 신을 찾거나 기도를 하곤 한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T’ 성향이 강한 나에게 신앙이란 먼 나라 이야기였다. 나에게 인생은 신의 섭리보다는 표준분포 곡선 위를 흐르는 확률의 게임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민간에서 떠도는 샤머니즘이나 무서운 괴담을 섞어 믿음을 강요하는 토속신앙에는 통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가끔 연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 타로 카드를 보기도 했지만, 매번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해 그마저도 관두었다. 어쩌면 지금의 아내와 점이니 하는 미신에 운명을 물어본 적 한번 없이도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뜻하지 않게 확신하곤 한다.

이런 무미건조한 T의 성향은 역설적으로 소방관이라는 직업을 수행하는 데 꽤 괜찮은 무기가 되었다. 처참하고 슬프며 안타까운 현장 속에서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상황을 무던히 넘길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의연함은 후천적인 연습보다는 타고난 기질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매 순간 피도 눈물도 없는 로봇처럼 굴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예기치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홀로 가슴앓이를 하기도 했고, 평소에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먼저 따뜻한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만약 내가 끝까지 사무적인 태도만 고수했다면 아마 공무원 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주변에서 기계적인 말투로 일하다가 살벌한 민원의 표적이 되어 고통받는 동료들을 적지 않게 보았으니까.(어쩌면 난 먹고살기 위해 사회화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근무하는 곳에는 구축 빌라와 낡은 단독주택들이 밀집한 동네가 하나 있는데,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특유의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골목마다 각양각색의 삶이 뒤엉켜 있는 그곳 한쪽에는 유독 무당집들이 줄지어 늘어선 거리가 있다. 대문 앞마다 연등과 깃발을 내걸고 '연천선녀', '애기동자', '태평장군', '꽃도령' 같은 이름표를 달아 자신이 모시는 신의 영험함을 뽐내는 곳이다.

어느 날, 그 무속인 골목의 연천선녀 집에서 사람이 한 명 나무에서 떨어졌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사고를 당한 이는 무당집의 잡일을 도와주던 50대 남성 일꾼이었다.


“아이고, 오빠! 내가 일 시작하기 전에 신목님한테 인사부터 올리라고 그렇게 말했잖아. 내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이렇게 사달이 나네, 에휴.”

남자는 측두부에 커다란 혹이 솟아 있었고 극심한 목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다행히 의식은 명료했고 팔다리의 움직임 같은 신경학적 이상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가 경추 보호대를 채우며 물었다.

“선생님, 목에 전혀 힘이 안 들어가시나요?”

“아니요... 살살 움직일 수는 있는데, 통증이 너무 심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네요.”

“네, 알겠습니다. 일단 억지로 움직이지 마시고 가만히 계세요. 저희가 들것으로 옮겨드릴게요. 혹시 병원에 보호자로 같이 가실 분 계실까요?”

내 물음에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연천선녀가 대답했다.

“제가 따라갈게요. 오빠한테 오늘 일 좀 도와달라고 불렀다가 괜히 다치게 했네요.”

곁을 지키던 연천선녀의 차림새는 의외로 평범했다. 긴 검정 치마에 진한 군청색 셔츠, 은색 비녀로 정갈하게 말아 올린 머리, 그리고 지적인 인상을 주는 무테안경까지. 얼핏 봐서는 그저 단정한 중년 여성 같았다.


구급차로 이송하는 동안 나는 환자의 병력을 확인하며 보호자를 안심시켰다. 그러자 연천선녀는 기다렸다는 듯 연신 감사를 표하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보살님 덕분에 우리 오빠가 편하게 병원 가네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복채라도 좀 드려야지요?”

“아닙니다. 119는 전액 무료이니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거듭 사양했지만, 그녀는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빳빳한 지폐 뭉치를 내 손에 억지로 쥐여주려 했다. 손사래를 치며 거절해도 막무가내였다. 급기야 그녀의 손이 내 구급 조끼 주머니 근처까지 들이치자, 나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던졌다.

“선녀님, 정 그러시면 돈 대신 점이나 한번 봐주세요. 저 궁금한 게 좀 있거든요.”

“아이고, 정 그러시다면 제가 기꺼이 봐드려야지요.”

분위기를 돌려보려 가볍게 물었다.

“제 인생, 앞으로 좀 순탄할까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천선녀의 눈빛이 변했다. 그녀는 허공 한 점을 멍하니 응시하더니, 오른손 검지로 왼손 등 위에 글자를 쓰듯 분주히 움직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믿기 힘든 사주 풀이가 흘러나왔다.

“앞으로 무탈하시겠네요. 그런데 집안에 아이 하나가 들어섰을 때 할머님 한분이 도와주셨네요. ‘안‘가쪽 분인데, 지금도 보살님 뒤에서 든든히 지켜주고 계시네요. 어느 쪽 할머니신가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내 머릿속 회로가 바빠졌다. 논리적 비약이나 교묘한 심리 전술이 아닌지 필사적으로 분석하려 했지만,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안' 씨는 돌아가신 내 친할머니의 성함이었고, 무엇보다 아내가 출산 당시 난산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며 사투를 벌였던 기억이 스쳤다.

“허... 선녀님, 그걸 어떻게 다 아세요?”

“보살님이 오늘 내어준 복채가 두둑해서 제가 모시는 선녀님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호호호. 할머님이 생전에 손주분을 지극히 아끼셨나 봐요. 기운이 아주 강하시네.”

놀라움과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평소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던 불길한 궁금증을 슬쩍 꺼내 보았다.

“저... 혹시 구급차 안에도 귀신이나 험한 것들이 붙어 있나요?”

연천선녀는 다시금 손등 위로 손가락을 분주히 놀리기 시작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구급차 안에는 귀신같은 건 없네요. 그런데 차 뒤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매달려 오고 있어요. 뭐, 험한 것들은 아니니까 걱정 말고.... 그런데 말이에요, 혹시 주변에 최근 상을 당한 사람이 있나요? 검고 어두운 기운이 하나 들러붙어 있네요. 구천에 미련이 아주 많이 남은 모양인데... 당분간은 몸조심 좀 하셔야겠어요.”


그 말에 등줄기를 타고 다시 한번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최근 부친상을 당해 초췌한 얼굴로 핸들을 잡고 있던 운전 주임님이 번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침 연천선녀의 기묘한 복채 풀이가 끝남과 동시에 구급차는 병원 응급실 앞에 멈춰 섰다. 더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자칫 천기누설이라며 한소리 들을까 싶어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앞으로는 정말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막연한 다짐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환자를 병원 침상에 조심스레 인계하고 돌아오는 길, 나는 운전석에 앉은 주임님에게 방금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말을 듣던 주임님은 핸들을 잡은 손을 미세하게 떨며 정말 용한 무당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안 그래도 요즘 밤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괴롭히는 통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고백을 듣는 순간, 나는 '타고난 T'니 '이성주의자'니 하는 거창한 수식어들을 미련 없이 내려놓기로 했다. 세상엔 확률과 통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 분명 존재했다. 오늘 밤 집에 돌아가면 물 한 사발 떠 놓고 간절히 기도를 올려야겠다. 확률 곡선 위의 점 하나로 살아가기엔,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신비롭고 영험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