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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감시.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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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준 Sep 22. 2024

7장: 생존자.

살아 있는 사람. 또는 살아남은 사람.

어둠 속의 오두막에는 긴장된 정적이 흘렀다. 달이 이내 빛을 잃어가던 깊은 밤, 숲의 냄새마저 싸늘해질 때쯤, 차가운 공기를 타고 흘러오는 피비린내는 당신의 감각을 깨우며 온몸을 긴장시켰다. 고요한 어둠 속, 당신은 멈춰 섰다. 눈앞에 보이는 오두막. 그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음침한 조명 아래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진다. 거무스름한 손이 당신을 향해 다가오더니, 늙은 남자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빛은 당신을 꿰뚫듯 날카로웠다.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나이까?”

낮고 쉰 목소리, 그의 사투리가 당신의 귀를 간지럽힌다. 늙은 영감의 눈이 가느다랗게 좁혀지더니, 당신이 손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른다. 저 멀리, 나무들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성채, 그곳은 요정들의 성이었다.

당신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 당신에겐 도움이 필요하다.

“해적들? 그 털북숭이 놈이 또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이야. 하, 참, 못된 놈들... 들어오슈. 뭐 할 얘기가 좀 길겠구먼.”

그의 말투는 무심한 듯 들리지만, 당신은 조심스럽게 그의 오두막으로 들어선다. 벽을 장식한 수많은 초상화들, 각기 다른 얼굴들이 당신을 마주한다. 마치 그들 역시 당신의 방문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네 이름이 뭐라 했더라... ■■라구? 허허, 그렇구먼. 반갑네, 나는 레드라 하오. 이 오두막의 주인인 동시에, 밀렵꾼이라 불러."

그가 벽을 가리키며 흐릿한 초상화들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짚는다. 낡은 그림들에는 저마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폴, 로즈, 제이크, 피어스, 크리스티나, 윌리엄, 린다, 레드... 그리고 달님...’

“저기 걸린 이들은 다 내 친구들이지. 도움을 청하고 갔던 사람들. 지금은 다들 먼 곳으로 떠났지만... 내가 그들을 잊지 않으려고 이렇게 놔뒀어. 자네도 이제 그 무리에 들어올지도 모르겠구먼. 뭐 좀 잡숫겠소?”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당신을 쳐다보는 그 눈동자에는 무심함, 혹은 무엇인가가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오두막 안으로 스며든 어둠과, 땅 밑에서 차오르는 습기가 공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늙은 영감은 당신을 흘겨보며, 굳은 얼굴로 입을 떼었다.

"요정 놈들, 저기서 또 인간들 홀리고 있구먼. 자네도 그쪽 인간 아니요? 뭐, 내 도움을 청한 자들은 전부 인간이었지. 다들 저 성에서 기어 나왔더라고."
그는 피식 웃으며 당신을 바라본다. 허름한 오두막 안에서 그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당신은 그저 침묵으로 응답했다. 영감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진짜 아무것도 안 잡수실라고? 에이, 싫음 놔둬라. 뭐 어쩌겠소, 강요할 순 없지."

영감은 그대로 수프를 떠먹으며, 고기 덩어리를 구워 먹었다. 나무 타는 냄새와 기름진 냄새가 오두막을 채웠지만, 그 향이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허름하고 낡은 공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에 감도는 미묘한 아늑함이 당신의 긴장을 조금은 누그러뜨렸다.

당신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벽에 붙은 한 글귀를 발견했다. 낡고 휘어진 종이에 적힌 내용은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손끝으로 그 글귀를 가리키자, 영감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다.

"저건 말이지... 인간 놈들 언어로 써놨더라고. 내가 뭐라고 써놨는지는 모르겠소. 혹시 자네가 읽을 수 있는감?"

당신은 천천히 글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보는 모든 물체의 거짓된 실체를 각인시켜라.

광원을 향한 질주를 당장 그만두기를 바랄 뿐이다.

살아라. 나의 몫처럼. 그것보다 값져지기를 바라며.

눈앞에 보일 모든 것은 거짓이오. 들릴 모든 것은 환청이며, 그려질 모든 기억은 환각이니.

부디 나를 구하여다오. 나의 앞을 그려다오.

저 눈동자는 감아짐에 터지듯 붉게 충혈됐다.'

당신의 목소리가 글귀의 마지막을 떨리듯 내뱉고 나서야, 영감은 잠시 손을 멈추고 천천히 당신을 바라봤다.

"뭔 내용인가?"

그의 질문이 무겁게 울렸으나, 당신은 어떤 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그 글귀가 품고 있는 의미는 너무나도 불길하고, 깊은 어둠 속에 숨겨져 있는 듯했다.

영감은 당신의 침묵에 짜증이 서린 듯 혀를 차며 말했다.

“벙어리가 왔는가. 하여간, 처음엔 잘만 말하더니… 이봐, 아무 말도 못 하는가?”

그가 쏘아붙였을 때, 당신은 문득 그 글이 불길한 내용이라고 느꼈다. 이 글귀가 오두막 안에 있는 것이 불쾌하다고, 차라리 버리라고 그에게 말했다. 영감은 당신을 흘깃 쳐다보더니 천천히 머리를 흔들며 대꾸했다.

“인간에 대한 욕이여? 하, 요정 놈들은 언제나 그런 식이지. 그 여왕이라는 인간도 저 해적 놈들만큼 타락한 년이라오. 저 글귀를 버릴 이유는 없네. 누가 뭐라 해도 내버려 둘 거요.”

그의 목소리에는 무관심한 듯한 냉소가 깃들어 있었다. 마치 당신의 충고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듯이. 그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오두막 안에 드리운 어둠을 한번 훑어보며 말을 이어갔다.

“시간이 늦었네. 자게나. 내일 자네가 출발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 테니.”

그는 천천히 침대로 몸을 눕히더니, 곧 그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깊은 코골이로 변해갔다. 오두막 안은 다시금 정적 속에 잠겼고, 불길한 긴장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당신은 그가 잠들기를 기다리며, 오두막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낡은 벽에 걸린 그림들은 묘하게도 생생했다. 그중에는 한쪽 구석에 놓인 하이힐이 그려진 그림, 스페이드 모양을 정교하게 그린 도안, 그리고 젊은 여인의 흐릿한 초상화도 있었다. 모든 것들이 마치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듯했다.

모든 것이 무엇인가 숨기고 있었다. 마치 이 오두막 전체가 거대한 퍼즐의 조각처럼 느껴졌다.

탁자 옆 책장에는 한 권의 책이 삐죽하게 빠져나와 있었다. 책의 표지는 마른나무가 그려져 있었고, 제목은 <감시>라고 적혀 있었다. 책을 집어 들고 첫 장을 펼친 순간, 당신은 자연스레 그 앞부분에 빠져들었다.

소설의 시작은 칠흑 같은 밤이었다.
'짙은 어둠이 무거운 장막처럼 내려앉은 밤하늘, 빗방울이 마치 도망칠 수 없는 방을 감시하는 듯 창문을 두드렸다."
폴은 빗물이 유리를 타고 흘러내릴 때, 그것이 마치 자신을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뉴욕, 브루클린의 한 밤. 이 날은 폴이 ‘감시자’로서 첫 기회를 얻은 날이었다.
젊은 여인의 집, 그 문이 살짝 열린 것을 보고, 그는 망설임 없이 그 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폴은 여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빗속을 뚫고 점점 커져오는 구두 소리와 함께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다. 로즈라는 이름의 여인이었다. 폴은 자신의 몸을 장롱 속에 구겨 넣으며, 아주 작은 틈 사이로 그녀를 엿보았다.
검은 블라우스와 재킷을 걸친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우아했다. 금발의 머리카락은 빛을 받아 반짝였고, 푸른 눈은 깊고도 날카롭게 그를 바라보는 듯했다.
폴에게, 로즈는 순수하면서도 위험한 매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녀는 마치 오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느리게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렸다. 차갑고 금속성의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고, 그녀는 천천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 연기가 서서히 거실을 채워가며, 마치 폴을 찾아내려는 듯 장롱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 묘사를 읽는 동안, 당신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소설은 기괴하고도 무서운 톤으로 점철되어, 그 안에서 폴과 로즈는 병적인 관계로 얽혀 있었다. 그런데... ‘폴’과 ‘로즈’라는 이름이 익숙했다.
그들은 아까 벽에 걸려 있던 초상화 속 인물들이었다.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느낌이 당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불안감을 견딜 수 없었던 당신은 결국 영감을 깨우기로 했다. 그가 코를 고는 소리를 뚫고 당신이 그의 팔을 흔들자, 그는 눈을 반쯤 뜨고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렸다.

"뭐... 시방? 자는 사람을 왜 깨워서 지랄이여... 아, 그 두 사람 말이가?"

그는 짜증을 참지 못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이어 말했다.

"아셔라, 그 둘은... 그냥 한 명이여. 이제 대답이 된 거요? 참, 이번 손님은 잠도 없군. 시벌. 그냥 신경 끄고 자게나."

당신의 물음에 대충 답을 하곤, 그는 다시 코를 골며 잠들어버렸다. 그의 말은 단순하지만, 그 속에 숨은 진실은 더더욱 혼란을 일으켰다. 폴과 로즈가 ‘한 명’이라니? 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곳에 무언가 기이하고 왜곡된 것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가슴속에 불안이 계속해서 요동치자, 더는 이곳에 머물 수 없다는 결심이 들었다. 당신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그가 다시 깊이 잠들기를 기다린 후, 서서히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와 함께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숲은 여전히 고요하고, 그 고요함은 더욱 무거운 불안감을 자아냈다. 발밑의 바닥에는 곰덫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 덫들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반사하며 당신을 경고하는 듯했다.

당신은 오두막을 뒤로한 채, 깊은 숲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마치 자유를 향한 길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무언가 더 거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당신을 엄습했다. 그러나 그 두려움조차도 당신을 이곳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꺾지는 못했다. 숲은 점점 더 깊어졌고, 당신의 발걸음은 점점 더 빠르게, 절박하게 움직여갔다.

당신은 조용히 움직였다. 곁에 눈을 감고 있는 남성을 피하며 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반면에 그는…

폴은 자신의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허상을 직시하고 있었다.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환각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그 환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환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공포 속에서 깨달았다. 저 환각의 저편에 '붉은 철문'이 있었다. 그것은 탈출구였다. 노숙자 레드의 오두막을 넘어서 탈출구에 다가가자, 폴의 시야에 보인 것은 더 이상 숲이 아니었다. 나무와 땅이 아닌, 벽지로 덮인 벽이었다. 숲의 이미지가 빽빽하게 그려진 벽지였다. 그 순간, 폴에게 있어 숲도, 요정의 성도 전부 허상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단지 벽지에 불과했고, 그는 그것을 오직 자신이 만든 감옥 안에서만 본 것처럼 느꼈다. 폴은 멈춰 섰다. 그저 벽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현실이란 이토록 무기력하고, 의미 없으며, 그것을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조차 기만적이라는 것을, 그는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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