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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감시.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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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준 Sep 22. 2024

8장: 변명자.

사리를 분별하여 밝히는 것이나 잘못에 대해 이유를 들어 해명하는 사람.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렇겠죠?

폴은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으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찬물은 그의 피부에 닿자마자 얼음처럼 차갑게 퍼졌고, 그의 무거운 눈꺼풀을 서서히 뜨게 만들었다. 그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니었다. 마치 오랜 시간 속에 파묻혀있던 가면을 쓰고 있는 타인의 얼굴이었다. 이제 폴에게도 시간이 온 것이다. 그 가면을 벗어던질 시간이. 그동안 그는 수없이 많은 얼굴을 걸쳐왔다. 감시자로서, 피해자로서, 고통 속에 허우적대며 외면해 온 자로서. 그 모든 역할들이 이제는 무의미해졌다. 폴은 자신의 주위에서 빛나는 환영들을 바라보았다. 요정들, 우주선, 그리고 저 멀리서 여전히 그를 응시하고 있을 로즈의 집. 그러나 그는 이제 알았다. 그 모든 것은 단지 그의 마음속에서 길을 잃은 상상에 불과했다. "너무 많은 길을 걸어왔어." 폴은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된 메아리처럼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폴은 마지막에 도착했고, 그는 이 모든 여정의 끝에서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진실을 직면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그의 가면을 찾아내는 것. 그 모든 혼돈과 고통의 시작이었던, 자신을 속이며 감추어왔던 진정한 얼굴을 다시 찾기 위해. 그는 거울 속 자신을 한 번 더 응시한 후, 천천히 손을 들어 그 무겁고 오래된 가면을 벗기려 시도했다.  폴은 거울을 노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그 가면을 붙들고 있었지만, 그것은 마치 그의 살갗에 깊이 박혀있어 떼어낼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그렇지.' 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오랜 세월 감추어온 이 가면은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이 아니라, 그의 본질에 닿아있는 무언가였다. 이건 단순히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폴이 서 있는 공중화장실은 불쾌한 악취로 가득 차 있었다. 오줌 찌린내가 코를 찔렀고, 그곳은 더럽고 황폐했다. 그럼에도 폴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그는 그 더러운 현실의 공간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저 멀리 벽에 걸려있던 말라비틀어진 나무 그림. 그것은 그의 모든 환상과 고통, 그리고 자신을 감싸고 있는 이 끔찍한 가면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 그림은 그의 삶을 삼켜버린 하나의 상징이었다. "해야 할 일이 있어." 폴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렸다. 그 그림을 찢어버려야 한다. 그 나무처럼 자신을 말라가게 한 이 가면, 이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폴은 자신의 손이 아직도 그 가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그 가면은 그저 그를 응시하며 비웃고 있었다. '어떻게든 벗겨내야 해.' 폴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그 가면은 깊이 박혀있었다. 그의 자아와 뒤엉켜 하나가 되어버린, 스스로 만든 감옥이었다. 폴은 거울 앞에서 혼란에 빠졌다. 그의 손은 여전히 거울 앞에 붙잡혀 있었고, 땀방울과 함께 물이 목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로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폴! 우릴 그렇게 죽여버릴 거야? 아니... 나의 신사분, 부디 저희를 살려주세요..." 그녀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엔 금발의 백인 여성, 그다음엔 흑인, 그리고 아시아인으로도 변해갔지만,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은 마치 폴의 정신 속에 고여있던 고통의 상징처럼 맑고 서럽게 흐르고 있었다.

요정들과 요정 여왕도 나타났다. 그들의 얼굴은 당황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소년, 나의 아이들이, 우리들이 잘못했네! 우리를 살려주게나!" 그녀의 목소리는 가녀렸지만 절박했다.

털보 선장은 당황스러워 보였다. "하하... 진짜 할 건 아니겠지?"라고 말하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그 눈빛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폴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선장은 잘 알고 있었다.

제이크 대원과 크리스티나 대장도 그를 향해 다가왔다. "이봐, 폴. 진정해. 우선 진정하자. 알았지? 이건 생각보다 별거 아냐." 제이크가 말했다. 크리스티나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폴 대원, 현명한 판단을 할 것이라 믿어요."

그리고 달님이 물에서 떠오르며 말했다. "오, 마지막이 다가왔구나. 나한테 작별인사를 할 자격은 없겠지." 그 목소리는 어딘가 차분하지만, 동시에 깊은 공허와 서러움이 묻어 나왔다.

그때, 밀렵꾼이 등장했다. 그의 표정은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뭔 미친 소리당가?" 그는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그리고 나도 말했다.
그러지 마! 우리의 존재를 없애지 말라고, 폴.
그 가면... 가끔은 망각이 더 행복한 편이라고... 너도 알잖아...?
이번만, 이번만 그냥 지나가. 어때, 응?

나는 폴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단지 그를 구하기 위해 애원했다. 모든 이가 그에게 매달렸다. 폴은 천천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며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자, 그는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단 한마디를 내뱉었다.

"꺼져."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거울 뒤편에 있던 로즈, 요정들, 털보 선장, 제이크, 크리스티나, 그리고 달님까지. 그들 모두가 신기루처럼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은 사라졌고, 울부짖던 목소리도 조용히 꺼져갔다. 그들이 남긴 공포와 고통도, 무력한 호소도 이젠 아무 의미가 없었다. 폴은 거울을 마주한 채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오랜 시간 그를 감싸고 있던 가면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가면이 벗겨질 때마다, 폴의 얼굴은 뒤틀렸고, 그의 숨결은 거칠어졌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이 가면을 벗겨내야만 했다. 그 순간, 화장실의 낡은 변기 칸막이가 삐걱거리며 열렸고, 그곳에서 노숙자 레드가 악취와 함께 비틀거리며 나왔다. 그의 몰골은 여전히 지저분했고, 구겨진 얼굴에는 술에 취한 흔적이 역력했다. 폴은 레드를 바라보며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레드, 아직도 이러면서 사시는군. 우리 모친은 자네 같은 거지새끼한테 안겨서 뭘 얻으려 했던 걸까. 참 비극이지." 폴의 말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레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폴의 조롱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술에 절어 비틀거리며 주정을 부릴 뿐이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흐릿한 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는 마치 이 세상 모든 짐을 지고 있는 사람처럼 느릿하게 화장실을 걸어 나갔다. 레드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환영들과는 달리 그는 진짜 사람이었으니까. 폴은 마침내 화장실에서 벗어나, 가면을 거기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왔다. 비가 막 그친 뉴욕 거리는 그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물기를 머금은 공기가 그의 피부에 닿았지만, 이제 그 차가움은 그를 두렵게 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지나가는 여성도 있었지만, 폴은 더 이상 그녀를 보며 로즈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가 품었던 모든 환영과 혼돈은 이제 사라졌다. 길을 걸으며 폴은 작은 노점에서 햄버거 하나를 사서 입에 물었다. 그는 예전과 달리 음식의 맛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허공에 머물던 감각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뚜렷해졌다. 그는 길가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 기사는 그를 힐끔 보며 담배를 물고 물었다. "목적지가 어디요?" 폴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브루클린."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택시 기사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불 좀 빌려주십쇼." 택시 기사는 성냥을 그어 불을 붙여주었고, 폴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연기는 그의 폐를 타고 넘어가, 마침내 그의 모든 혼란과 함께 사라졌다.

"그나저나 정신병원에는 어쩐 일이요? 아, 이런 질문은 실례인가?" 택시 기사는 물었다.

"정신병원이오? 난 이 앞 공원 공중화장실에 들렀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 입니다만." 폴은 대답했다.

"아니면 말고.." 택시 기사가 연기를 뿜었다. 도시에 돌아다니는 노란 택시와 경찰차들이 폴의 눈에 들어왔다.

"이봐, 옷이 그게 다요? 노숙자도 아니고.." 택시 기사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진 후, 라디오를 틀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곡은 도메니코 모두뇨의 Volare였다. 그 음악이 폴의 귀에 닿자, 모든 것이 새로운 감각으로 덮였다.

"Pienso que un sueño parecido no volverá más"

창문 밖으로는 사람들, 자동차들, 그리고 서서히 활기를 되찾는 뉴욕의 거리 풍경이 보였다. 빗방울이 도로 위에 반짝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길을 걸었고, 자동차들은 여전히 바삐 움직였다.

"Mi dipingevo le mani e la faccia di blu"

폴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주변을 둘러봤다. 거리의 가게들, 상점들의 불빛이 그에게는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더 이상 어두운 환영 속에 머물지 않고, 그의 시야는 다시 현실을 또렷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Poi d'improvviso venivo dal vento rapito"

택시 기사의 담배 연기가 천천히 떠오르며, 차 안을 가득 메웠다. 폴은 택시 시트의 거친 촉감을 느끼며,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셨다.

"E incominciavo a volare nel cielo infinito"

음악은 계속해서 흐르고, 폴은 음악에 자신을 맡겼다. 창밖 도로의 빗물은 여전히 마르지 않았고, 뉴욕의 특유의 바삐 돌아가는 공기가 그의 폐 속을 가득 채웠다.

"Volaré, oh-oh"

뉴욕 거리와 다리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이제야 진짜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든 익숙한 풍경들이 낯설게도 새롭게 다가왔다. 폴은 깊은숨을 내쉬며, 이 어지럽기도 했던 여정의 마지막을 느끼고 있었다. 택시가 멈추자, 기사가 라디오를 끄고 뒤돌아보며 물었다. "도착했다오. 택시비는?" 폴은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기사에게 건네며 말했다. "여기 있네. 잔돈은 됐어." 택시를 떠나며 폴은 판잣집 같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다른 감각이 그를 감쌌다. 비록 허름한 집이었지만, 폴은 그 속에서 새로운 시각을 발견했다. 그는 문을 닫고 잠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고칠 수 있다던 믿음, 그건 잘못되지 않았어.' 폴은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환각 속에서 길을 잃지도, 그 어떤 가면 뒤에 숨어 있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을 찾았고, 그 사실에 행복히 웃었다. 그것은 폴의 새로운 시작, 그리고 더 이상 가면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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