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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말고이응 Mar 15. 2016

졸업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우리의 노래는 여전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얼굴에 근심, 걱정 하나도 없는 놈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개강하는 날, '복학생' 친구가 내린 새내기에 대한 평이다. 사무실에 박혀 동영상을 편집하다 그 말이 생각나 새내기들이 부러워 부르르 떨었다. 인코딩이 끝나는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새까만 모니터에 내 얼굴이 비친다. 20살, 명륜동 에서 소주 한 병 너머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들은 어느새 각자의 모니터 앞에서 각자의 얼굴을 비추어보는 것이 일상이 됐다.


저 말을 꺼낸 '복학생' 및 동기들과의 술자리를 생각해본다. '복학생'은 '그냥 웃지'라는 술집에서 파는 족발 파채를 좋아해서 우리를 데리고 그 곳에 자주 향했다. 우리는 '그냥 웃지'에서 그냥 웃지 못하고 별 시시한 대화를 한껏 심각하게 나누었다. 이야깃거리는 뭉툭하기 그지없었다. ‘연애가 뭘까?’ ‘왜 사는 걸까?’ 대문호도 답하지 못할 질문거리들을 용감하게 술안주로 꺼내어 놓을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답할 수 없는 질문이 필요할 만큼 20살의 뒤통수들이 너무나 한가로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명륜동으로, 빽빽한 호프집에서 작은 선술집으로, 솎아진 인연을 만나 그렇게 우리는 함께 20대 초반을 소비했다. 찌질한 짝사랑을 하고 과 행사 준비로 서로 마음도 상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지나는 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우리가 발산할 수 있는 푸름은 한정되어 있는데 헤엄쳐야만 하는 물은 계속 불어날 것이라는 것을. '어른'이라면, '안정'되려면 좀 더 큰물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바닷물에 파란 포스터칼라 약간을 풀어헤친 것처럼 20대 초반은 그렇게 연해져 간다.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친구들이 모두 군대로 가고 휴학을 한 혜화동 로터리에서 플라타너스를 보며 나는 김광규의 시를 자주 생각했다. "푸른 잎들이 이미 너무 많이 연해진 것은 아닐까." "혜화동 로터리를 걷는 기성세대가 되어 그 이파리들이 다 떨어지고나면 나는 우리를 어떤 이름으로 기억해야 할까." 그렇게 '슬프다', '허전하다', '붙잡고 싶다', 바보같이 그렇게만 계속 되뇌었던 것 같다. 생각이 괴롭고 복잡해 자기소개서, 스펙, 연봉이라는 단어에 시나브로 삶을 내주었다. 그게 편했다.


그렇게 열심히 세상에 첨벙되다 물 빠진 채로 다시 캠퍼스에 들렀다. 졸업식 날이었다. 금잔디 위에 사람들은 가득 차 있었다. 입학식 때처럼 사람들 무리 중 한 명이 되어 멍하니 학교를 바라봤다. 낮잠 자던 중앙도서관, 막걸리를 마시던 벤치, 성한 게 없는 과방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그런데 저 멀리, 입학식과는 달리, 사람들 사이에서 솎아진 인연들이 보였다. '졸업 축하해'라고 말하는 그들의 입은 왜인지 새내기의 그것과는 달리 근심과 걱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깨동무를 하고 오랜만에 술 한 잔 기울이며 면면히 들여다본 우리들은 여전히 철이 없고 미성숙한 20살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기에,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문득 이파리가 떨어질 것만 걱정하다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미 근심이 생겨버린 우리는, 어딘가로 흩어져 낡은 달력을 끼고 정처 없이 거닐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인생의 단 한 번뿐인 순간들이 이미 지나갔다. 그러나 분명 우리는 항상 기억할 것이다. 그 언젠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불렀었다는 것, 누군가가 아무리 부정하려해도 그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나 그리고 친구들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가장 빛나는 구절을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답고 복된 옛사랑을 가졌다는 것을 말이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졸업. 친구들의 어린 날들을 떠나보낸다는 것. 허전하다. 앞으로도 분명 허전할 것이다. 명륜동과 혜화동 거리를 거닐며 나누었던 그 대화들이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랑에 상처가 있듯, 어쩌면 이토록 빛나는 옛사랑에 이정도의 허전함은 감수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대학생이라는 푸른 여름. 그렇게 끝이 났지만 우리가 녹음처럼 쏟아져 나오며 거닐던 그 거리에, 우리의 노래는 여전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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