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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말고이응 May 09. 2016

쇼생각탈출과 '생각들'

동료들만 있다면 탈옥은 두렵지 않다

최근 PESM 증후군(과잉생각증후군)이 웹에서 화제였다. 끝없이 생각을 하는 것은 전 인류의 몇 퍼센트만 겪는 일종의 병리 현상이라는 골자의 글이었는데, 댓글을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고 있었다. 덕분에 전 인류의 몇 퍼센트만 겪는다는 글의 신빙성을 즉각적으로 의심할 수 있었다.


나도 PESM 증후군인지 뭔지 종종 생각을 하다 밤을 샐 때가 있었다.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1) 논리, 2) 인과, 3) 진지. 생각을 구성하는 세 축이 날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는 효능감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현명하디 현명한 호모 싸피엔스 싸피엔스다! 고로 고도의 생각을 할 수 있다! 이 생각들은 의미 있을 것이야!” 그러나...

나는 호모 싸피엔스 싸피엔스다.


밤새도록 당신을 들락거리는 생각들 (ex. 내일 회사에 그 일은 잘 마무리 될까)
당신을 잠 못 들게 하는 생각들 (ex. 취직할 수 있을까)

(중략)

당신을 미치게 하는 생각들 (ex. 자야되는데 생각을 그만하고 싶다)
미쳐가는 당신을 조롱하는 생각들 (ex. 생각을 그만하고 싶단 생각을 그만하고 싶다)

(중략)

당신을 고무(鼓舞)시키는 생각들 순식간에 (ex. 벤츠 c200 쿠페 사야지)
당신의 고무를 무화시키는 생각들 (ex. 연봉보다 더 비싸네)

(중략)

당신의 텅 빈 해골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가차 없는 생각들       

황병승, 생각들


잠을 못 이루게 할 정도의 생각은 삶의 밸런스를 무너뜨린다. 생각을 하는 것이 내가 되는게 아니라, 생각의 감옥에 되려 옥죄어가는 것이다. 그럴 때 동료들이 필요하다. 1) 논리를 파괴하고 2) 인과관계를 무시하고 3) 진지 따위 개나 준 하루를 보낼 쇼생각탈출 동료들. 이 과정들을 통해, “사실 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탈을 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야. 짧게 말하면 넌 멍청이란 뜻이지.”를 속삭여줄 동료들 말이다.


연휴의 마지막이었던 어제. 회사 생각이 밀려올 타이밍에 약대에 편입한 친구가 뜬금없이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다. 회사 생각을 슬슬 하고 있을 다른 직장인 친구 하나도 불러 셋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1) 논리

우리는 논리적으로 행선지를 선택했다. 귀납적 데이터에 따라 매우 합리적으로 네이버 지식인에서 많은 사람들이 추천한 드라이브 코스를 골랐다. 그리고 팔당댐에 팔당냉면을 먹으러가기로 했다. 문득 약대 친구가 말했다. “우리 학교 후문에도 팔당냉면집이 있는데 팔당댐을 가야돼?” 그렇게 팔당댐 드라이브는 취소됐다. 그렇다고 쟤네 학교 후문 가서 팔당냉면을 먹은 것도 아니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팔당댐 가자는 말은 쟤가 먼저 했는데. 한강에서 치맥했다.

오늘 등교해서 팔당냉면 먹었다고 카톡 보냈다.

2) 인과

두런두런 한강 옆에서 소개팅 이야기를 하다가 약대 친구는 직전 소개팅 이야기를 했다. 직장인 친구가 “선톡했니?”라고 물어봤다. 그리고 약대는 패기 있게 손 두 짝을 내밀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선톡과 손의 인과관계는 무엇일까? 혼자 에이비씨 게임 하다가 씨를 한걸까? 직장인 두 명의 동공에 진도 8.0 정도의 지진이 나기 시작했다. 유난히 울림통이 큰 약대는 그날 가장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톱했다”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너. 질의응답 실패. 그리고 나중에 볼링 치다가 그 잘난 손톱도 깨먹는 멋진 최종 결과를 양산했다.

그래, 손톱했네.

3) 진지

여기까지 썼으니 어제의 이 만남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서 의미부여를 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은데, 도저히 쉽지가 않다. 애초에 왜 만남의 근본부터 가볍기가 그지 없었다. 별로 타먹지도 않을 거 만약을 대비해서 소주 1병은 왜 산건지? 팔당댐 가쟀다가 코엑스 가쟀다가 제2롯데월드 가쟀다가 결국 논현에 왜 간 건지? 손바닥 뒤집듯 정하고 실행하고 정하고 실행하고의 반복이었다. 재벌 3세 뺨치는 사행성을 가진 볼링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략 6시간은 같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진지한 대화는 생각이 안 나고 마냥 재미있었던 느낌적인 느낌만 남았다.

어제, 가장 '진지'한 순간의 그녀.

이렇게 신나게 놀고 집에 돌아와 이불을 덮고 누우니 웃음이 피식피식 났다. 그러고 보니 약대와는 고등학교 시절, 자습시간 기숙사 독서실 창문을 넘고 10차선을 달려 노래방에 갔었다. 감독하던 선생님이 창밖을 휘휘 둘려보셨지만 벽에 딱 붙어 등잔 밑이 어둡다를 몸소 체험했다. 입시를 할 때부터 직장인이 된 지금까지 쇼생크탈출의 레드와 앤디 뺨치는 탈출의 소울 메이트가 따로 없다.

숟가락으로도 탈옥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네.

친구지만 각자의 사정은 조금씩 다른 우리는 각자의 수저를 쥐고 (그게 흙수저든 뭐든 간에) 열심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전보다 스트레스들의 밀도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수치들로 나오는 것 같아 슬프다. 그러나 여전히, 가끔 생각의 탈을 쓴 걱정이 삶을 짓누를 때 이렇게 탈옥 작전을 한 번 짜보자고 불러주는 이들이 있어 너무나도 기쁘다. 그래, 수저로 미친 듯이 굴을 파 탈옥한 러시아 마피아를 롤모델로 열심히 파보는 것이다. 어차피 탈출은 불가능하겠지만! 이들과 함께한 쇼생각탈출, 쇼생크탈출 못지 않게 내 인생의 한 순간으로 남을 명장면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그들의 멍청함으로 내가 멍청하다는 걸 일깨워줘서 매번 고맙다.

2014년에도
2016년에도 같은 포즈, 같은 멍청함, 같은 쇼생각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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