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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말고이응 Jul 21. 2016

면스플레인과 '정확한 질문'

자꾸 다르게 보여

면스플레인. (면+Explain) “평양냉면엔 식초 넣지마.” “평양냉면은 어디가 제일 맛있어.” “평양냉면의 맛을 아직 모르다니!” 등등, 평양냉면에 관하여 남에게 가르치려 드는 태도를 혐오하는 단어다. 페이스북에서 면스플레인을 하는 사람들을 ‘가장 싸구려 미식을 하는 종자들’이라고 심하게 표현한 글도 보았다. 게다가 그 글은 꽤 많은 좋아요를 받고 있었다.


나는 평양냉면을 좋아한다. 아무것도 넣지 않았을 때의 그 밍밍한, 탐구하게끔 유혹하는 육수가 좋다. 지극히 내 개인의 감각이다. 그러나 평양냉면의 열렬한 팬임에도 면스플레인을 한 적은 없다. 평양냉면을 먹어본 지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았고, 엄마를 모시고 평양냉면집에 갔을 때도 엄마가 식초를 넣는 걸 전혀 말리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냉면을 먹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엄마가 제발 내가 느낀 그 맛을 그대로 느꼈으면 좋겠다.”


미각. 촉각. 통각. 감각의 영역에서의 공감과 언어의 영역에서의 공감은 다르다.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아주 약간 상기된 체온 때문에 상대방을 좋아하게 된다. 사랑한다는 말에도 아주 약간 빛깔이 바래진 눈빛 때문에 헤어지곤 한다. 사랑한다는 말만으로 사랑을 시작한 사람은 많지 않다. 후각, 시각, 촉각, 미각, 우리는 언어에 앞선 감각의 영역에 살고 있다. 감각이 확신을 줄 때 우리는 가장 안정감을 얻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상태에 매혹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감각으로 깨달은 너의 감정. 너 또한 감각적으로 우리가 사랑할 것임을 알았다면. 우리의 사랑이 감각의 대화로 시작했다면. 이는 가능성이다. 어쩌면 언어로는 절대 깨뜨릴 수 없는 외로움의 영역을 무너뜨릴 가능성. 내가 느끼는 이 감각을 오롯이 내가 아닌 누군가가 느낄 수 있는 극도의 공감. 궁극적 외로움의 소멸. 사랑의 상태는 그것을 꿈꾼다.


사랑과 등치에 놓기에 면스플레인은 조금 웃긴 단어지만, 면스플레인 또한 감각적 대화를 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그 욕구가 아주 사소하게 발현된 것이다. 수만 끼의 식사시간에서 이번 한 끼는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나의 미각이 느낀 것을 너의 미각도 오롯이 느껴라! 나와 같은 감각을 느껴줘! 맛이? 뭐, 맛이 없다고?


“왜? 맛있어야 정상 아니야?”


면스플레인이 욕을 먹는 이유도, 사랑이 끝나는 이유도 인간은 결국엔 “정확한 질문”을 던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감각은 그냥 나의 것일 뿐이다. 외로움이 없는 완벽한 정신 상태를 지닌 생명체가 어딘가 있다면 인간은 존재가 장애이다. 같은 감각의 터널을 따라 사랑에 빠졌다고? 사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외로움이 소멸할 가능성에 매혹된 인간의 해석일 뿐이고, 우리는 각자의 터널을 거쳐 사랑이라는 결론만을 낼 뿐이다. 근은 같으나 방정식이 서로 틀린 것이다.


방정식이 틀린 상대에게 우리는 정확한 질문을 던질 수가 없다. 내가 외운 공식으로 접근할 수가 없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째서 너는? 대체 너는 무엇을 느끼고 있니? 우리의 관계에서 대체 너는 어디쯤 있니? 네가 감각으로 얻은 그 정확한 답들은 무엇이니? 언어로 정제되기 전 그 어딘가의 그 감각들 말이야. 도무지 모르겠어. 넌 자꾸 다르게 보여.


자꾸 다르게 보여
당신은 이미 태어났는데
당신은 사랑을 했었는데
당신은 지난해의 가을을 여행 중인데
....
오늘은 자꾸 다르게 보여
....
당신의 취미는 어제와 다르고
당신의 비내리는 서해는 그제와 다르고
....

정확한 질문, 이장욱


엄마를 모시고 우래옥을 갔다. 엄마와 나는 같은 맛, 같은 온도, 같은 습도, 같은 소음이 존재하는 곳에서 한 그릇의 냉면을 먹었다. 엄마는 말했다. “봉피양이 더 맛있네.” 나는 우래옥이 더 맛있는데 말이다. 왜 봉피양이 더 맛있을까? 나는 엄마에게 “정확한 질문”을 던지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다. “엄마, y=x해서 봉피양이 더 맛있는 것 아니야?” 그러나 도무지 근을 찾을 수가 없다.


대체 엄마의 감각은 어떤 터널을 거쳐온 것일까? 정녕 나는 조명 한 점 없는 상대란 터널 속에서 헤매여야만 하는 걸까?


다르게 보여
하지만 정확한 질문만 던질거야
당신을 향해
금방 식사를 마친 듯한 표정으로

정확한 질문, 이장욱


금방 식사를 마친 듯한 표정.

면스플레이너라면 아마 이런 "비정확한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엄마, 엄마가 아직 평양냉면 맛을 잘 모르는 것 아니야?"


냉면 한 그릇과 당신. 우리는 두 가지 변수에도 "정확한 질문"을 구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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