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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말고이응 Jul 06. 2016

TV라는 '족쇄'

꽤 긴 족쇄였을지도

지난 주말, 고향 친구 3명과 한남동에서 놀았다. 항상 부딪히던 그 난제에 또 다시 부딪히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뭐하지?’가 핵심 안건으로 대두된 것이다. 각자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친구 김씨는 아이디어를 냈다. “방 탈출게임 해봤나?” 재미는 있을 것 같은데... 다들 2프로 부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한강에서 자전거는?” “볼링 치러갈까?” “연극? 뮤지컬?” 그러던 와중,


문득 내 목구멍에는 말 한마디가 꾸역꾸역 올라오기 시작했다. 말하면 분명 비웃음을 살 것 같았다. 그러나 저질렀다. “집 가서 같이 TV나 보자.” 아니나 다를까 친구 추씨는 1초 만에 바른 자세로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80년대에 동네에 TV 한 대 있을 때나 하는 소리를 하노?” 그러나 친구 조씨는 사뭇 내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더니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집으로 가자. 우린 TV를 같이 보는 거다. 내가 ‘무한도전’과 ‘마리텔’을 보여줄게.”


그 길로 우린 조씨의 아파트가 있는 둔촌동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사이좋게 널브러져 무한도전을 샀다. (그것도 400원이나 더 비싼 HD로 말이다! 조씨는 부자인가?) 구매에 성공하자 경쾌한 무도송과 앞니가 툭 튀어나온 유재석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날 무한도전의 주제는 유재석으로 살기vs박명수로 살기였다. 우린 그 주제에 대해서 토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차장이 국장의 호주머니를 터는 부분에서는 세상이 떠나가라 함께 웃으며 자지러졌다. 김씨가 한 마디를 보탰다. 


“아, 이거 원래 혼자 보면 이렇게 안 웃겼을 것 같은데.” 


그렇다. 알고 보니 우리가 함께 봤던 487회는 망한 웹툰 특집으로 인해 재미가 없다고 시청자들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은 회차였다. 뭐 그런 게 대수인가? 같이 보면 재미없는 것도 재미없다고 욕하면서 재미있어지기 마련이다. JTBC의 아는 형님까지 섭렵하고 수박을 나눠먹고 나서야 우리는 조씨의 아파트를 떠났다. 떠나면서 우리 모두 입 모아 말했다. 


“우리 가끔 이렇게 모여서 TV나 같이 보자.”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TV가 1 대였던 때 아빠는 가요무대를 너무나 좋아했다. 가요무대가 싫었던 엄마는 그런 아빠를 보고 나이에 답지 않게 늙게 산다며 나에게 몰래 흉을 봤다. 생각해보면 이런 류의 TV 쟁탈전은 매일의 일상이었다. 오빠는 WWE와 스타리그를 꿋꿋이 보다가 성격 더러운 초딩인 나에게 깨물린 적도 있었다. 저녁밥을 먹을 때면 아빠는 9번으로 채널을 돌렸다. 여섯시 내고향, 지긋지긋하고 보기 싫었다. 그래도 곧 재미있는 프로그램도 할 테니 거실에서 기다려보곤 했다. 그러나,


이제 TV는 더 이상 사람들을 하나의 공간에 묶어 놓는 족쇄가 될 수 없다. “지금이 80년대냐?”라던 추씨의 말은 너무나도 맞는 말이다. 휴대폰과 노트북, 아이패드는 우리에게 무한한 콘텐츠의 자유를 줬다. 그렇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그 자유는 종종 공허함을 가져오곤 한다. 혼자 아이패드를 보다 꺌꺌 웃을 때, 나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인터넷에 접속한다. 콘텐츠를 실시간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네이버 라이브톡에 접속해 나도 댓글을 하나 남긴다. “ㅋㅋㅋ”. 다른 사람들의 댓글도 올라온다.


 “ㅋㅋㅋ” “ㅋㅋㅋ”


TV라는 족쇄를 끊어낸 것처럼 기술은 인간을 관계와 공간 속에 묶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족쇄들을 깨뜨리고 있다. 씨티폰이 우릴 공중전화와 전화방에서 해방시켰다. 마찬가지로 VR은 콘텐츠계의 시티폰이 되어 인간이 꿈꾸던 지극히 사적인 판타지를 만들어낼 것이다. 영화 Her는 어쩌면 더이상 SF가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개인에게 딱 맞는 Personalized Service는 모든 기술의 궁극적 지향점이자 꿈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치만 곰곰히 생각해보자. 우리를 한 공간에 엮어두었던 수많은 족쇄들. 


사실은 꽤 길지 않았던가?


다시 10대가 되어 TV 앞으로 돌아가본다.  '여섯시 내고향'은 10대가 끝나도록 괴로웠지만 'WWE'와 '스타리그'는 결국엔 나도 즐기게 되었다. 오빠와의 우정이 너무나 돈독해졌다. 존 시나의 테마송을 함께 부르고 피니시 기술을 연마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피시방에서 함께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또 하나, 학생인 주제에 월요등교병을 앓던 나에게 가족들의 등짝을 퍽퍽치고 꺄르르 웃으면서 보는 '개그콘서트'는 탁월한 월요병 치료제였다. TV라는 그 족쇄가 우리 가족의 옆에 나를 묶어두던 고마운 존재였을 지도 모른다. TV, 이 정도의 족쇄라면 꽤 감당할 만했다.


족쇄도 길면 자유롭다.


배지훈, 족쇄


족쇄도 길면 자유롭다. 10년 전 쯤, 중학생 시인 '배지훈'이 쓴 '족쇄'라는 시이다.  어쩌면 우리는 얽어둔 모든 것들을 얽어두었다는 사실 그 자체로 벗어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어리석은 것은 얽히지 않는 삶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태도와 생각이다. 우리는 TV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세계로 떠나게 됐지만 스마트폰, 즉 개인성의 족쇄에 묶여 홀로 고독한 서사의 늪을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진보가 아니라 등가교환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점은 이 등가교환이 시대의 흐름이라는 이름으로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우리를 얽매는 족쇄는 TV가 아니다.


우리는 TV라는 족쇄가 답답해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 족쇄는 꽤 길었고, 자유로웠고, 인간의 옆에 인간을 묶어두는 순기능도 있었다. 우리가 TV라는 족쇄를 끊어내고 다른 플랫폼으로 뛰어든 것은 어쩌면 우리를 옭아매는 가장 커다란 족쇄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시대의 흐름'이라는 족쇄이다. "우리 같이 TV나 볼래?" 목구멍에 차오르는 말을 숨기게 만드는 이유. 그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모두 나아가는 듯 할 때, 한 발 당당히 뒤로 돌아서는 것. 족쇄에 그저 얽매여 있는 자신감. 그 자신감을 갖는 것은 쉽지 않다. 진화를 통해 기라성 같은 세상을 이룩한 싸피엔스라는 종족이라면 시대의 변화에 본능적으로 적응할 수 밖에 없다. 콘텐츠 선택권보다 고독감이 더 큰 문제인 사람도 아이패드와 이어폰을 구비하기 시작한다. 마치 나처럼 말이다. 


점점 더 진화하고 있는걸까? 20대가 된 나는 이제 집에 가도 더이상 TV 앞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혼자 아이패드로 콘텐츠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한다. 10대 시절 그토록 리모콘을 잘 넘겨주지 않던 아버지. 이제는 안방에 혼자 누워있는 나를 향해 외친다.


 “딸, 거실에서 네가 보고 싶은 것 봐!”


안다. 아마 오랜만에 고향집에 내려온 딸의 얼굴을 좀더 보고싶은 아버지의 마음일 것이다. 나는 방에 있다가 슬그머니 거실로 나온다. 딸은 시대의 흐름에서 몇 발을 뒤로 내딛는다. TV라는 족쇄가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 생각하는, 조금 느린 아버지와 발을 맞춰 걷기로 한다. TV라는 족쇄. 앞서 말했듯 꽤 자유로운 족쇄이고 가족 곁에 가족을 묶어두는 순기능도 있는 족쇄이니까. 가끔은 순순히 얽매여있는게 아둔해보이지는 않으리라. 사실, 계속 묶여있고 싶은 게 나의 진심인지도 모르겠다. 응답하라 1988 시리즈를 보며 동경에 가까운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어쩌면 나만의 진심은 아닐지도.


족쇄도 길면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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