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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말고이응 Apr 08. 2018

이상(理想) 기후

18살의 여고생 은정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형형색색의 스크린이었다. 스크린은 세상 여러 곳을 비추고 있었다. 화창하게 햇살이 쏟아지는 LA의 ‘Hollywood’, 구름이 잔뜩 낀 파리의 ‘에펠탑’. 그러나 그 중 은정이 단번에 알아본 것은 장맛비가 쏟아지는 서울의 ‘마포대교’였다. 은정은 젖은 코트를 입은 것처럼 무겁고 으슬으슬한 추위를 느꼈다. “깼니?” 멀리서 말끔한 오피스룩을 갖춰 입은 한 중년의 아저씨가 걸어왔다. 아저씨는 스크린 앞 사무용 의자에 앉았다. “네. 깼어요.” 은정은 심장이 조금 천천히 뛰는 것을 느끼며 답했다.


“여긴 어디죠?” 은정은 문득 이 스크린들의 용도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아저씨는 은정의 속마음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했다. “용도? 그냥 세계 곳곳을 바라볼 수 있는 거란다. 세계 여러 도시의 날씨도 알 수 있고.” 은정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기상청인가요?” “기상청은 아니란다.” 마포대교의 비는 한강물을 더 강하게 때리고 있었다. 그곳을 비추는 스크린이 뿌옇게 가려질 정도였다. 은정은 어색한 사람과 나누는 대화처럼 날씨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기상청에서 서울에 어마어마한 비가 하루 종일 내릴 거라 하더라고요.” “그래? 곧 그칠 것 같은데?” 아저씨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은정은 문득 4월의 하굣길이 떠올랐다. 훈풍과 벚꽃 잎이 함께 불어온다던 기상청의 말이 무색하게, 그날은 4월에 유래없는 우박과 진눈깨비가 함께 내렸다. 같은 반 아이들은 즐거움 섞인 비명을 지르며 함께 운동장을 가로질러 갔다. 그 달리기의 끝에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승용차와, 승용차 안의 부모님이 있었다. 은정은 홀로 운동장을 뛰었다. 기상청이 야속해졌다. 바로 코앞인 내일의 날씨도 예측하지 못하다니. 그러나, 그때의 기억 외에는 기상청은 ‘내일의 날씨’를 꽤 잘 맞췄고, 은정도 자신의 내일을 잘 예측했다. 은정은 어제보다 내일 더 가난해졌고, 외로워졌고, 고통스러워졌다.


“글쎄요. 절대 안 그칠 것 같은데요.” 은정은 마포대교를 보며 깊은 슬픔을 느꼈다. 아저씨는 그런 은정의 마음을 모르는지 농을 걸었다. “내기할까?” “네?” “비가 그칠지, 안 그칠지 내기하자고.” 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안 그칠 것 같아요.” “뭘 걸래?” 은정은 곰곰이 고심했다. 무언가 홀린 듯 답했다. “저를 제 멋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세요.” “아저씨는 비가 그친다에 걸게. 비가 그치면, 넌 내게 너를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거야.” 은정은 어찌되든 좋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크린을 바라봤다. 뿌옇게 가려진 장맛비는 우레처럼 세상을 때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그 사이로 하늘을 갈라놓는 한 줄기의 빛이 내려오더니, 세상을 조금씩 밝히기 시작했다. 그때, 은정의 눈에 섬광이 비쳤다.


“금일 마포대교에서 미래를 비관한 여고생이 자살을 기도하기 위해 다리 위를 올랐다가 저체온증으로 졸도하였습니다. 쏟아지는 장맛비로 좋지 못한 시계 때문에 그 여고생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다행히 기적적으로 비가 그쳐, 심정지 상태에 이르기 전에 대교를 지나가던 행인이 발견해 살렸다고 합니다.”


은정은 한 병실에서 눈을 떴다. 죽기로 결심한 그날, 제멋대로 없애기로 마음 먹었었던 거울 속 얼굴과 팔다리, 몸은 참 익숙했지만, 오늘따라 조금 달라보였다. 은정은 비가 두드리는 병실의 창을 바라보았다. 다시 장맛비가 요란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내일도, 모레도, 절대 그칠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은정은 왠지 알 것 같았다. 언젠가 저 비도 예측하지 못한 순간 끝난다는 것을. 마치 한 번도 비가 내리지 않은 것처럼, 다시 따뜻하게 세상의 모든 심장을 뛰게 해줄 것이란 것을.


은정은 병실의 창을 그날의 스크린처럼, 그렇게 한참 바라보았다.


written by 최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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