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 우린 둘 다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모습을 보며 자랐고, 거기서 파생되는 부정적인면들을 너무 많이 본 사람들이었다.
어릴 적엔 그런 불안을 가진 적도 있었다. 내가 어른이 되면 혹시 아빠처럼 술에 중독되는 건 아닐까. 아니면 아빠랑 비슷한 남자를 만나 똑같은 고생을 반복하진 않을까. 그러나 다행히 양쪽 모두 아니었다. 게다가 우리 자식들은 부모가 술 마시는 장면을 볼 일이 없으니 이제는 알코올 중독에 대한 불안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한 건 '중독에 취약한 유전자가 있다'는 기사를 보고 나서부터였다. 알코올중독 부모에게서쌍둥이가태어났는데, 어릴 때 각기 다른 가정으로 입양됐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알코올중독자가 됐다고 했다(양부모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또 바로 다음 세대에서 중독이 발현되지 않더라도 그다음 세대에서 다시 알코올 중독이 발현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오래전에봤던 기사라 출처를 찾을 수가 없네요).
거기에 더 충격적인 기사도 있었다. 알코올 중독 위험이 높은 사람은 게임 중독에 빠질 위험도 높다고. (출처: 뉴스퀘스트 김형근 기자 "알코올 중독과 인터넷 게임 중독, 동일한 유전자 뿌리에서 나와", https://www.newsque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3211)
이럴 수가……. 우리 아빠는 알코올 중독으로인한 간경화로 돌아가시고 시아버지도 매일 반주를 즐기시는데, 그럼 우리 애들은양가에서 '중독의 DNA'를 물려받은 게 아닐까?스멀스멀. 불안의 먹구름이 밀려온다.
나에게도 '중독의 DNA'가 있을까생각해 봤다.술 담배는 아니지만어딘가에항상 빠져있던 것 같기도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내게도 정말 '중독의 DNA'가 잠재돼 있던 걸까?
처음으로 기억나는 건 문방구 '뽑기'다. 1등 상품으로 '무려' 세일러문 목걸이가 걸려있었고, 내가 학원 간 사이에 누군가 '나의' 세일러문 목걸이를 뽑아갈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돈을 구하기 위해 옷걸이로 장롱 밑을 뒤졌다. 먼지 묻은 머리카락과 함께 잠자고 있던 동전들이 꽤나 짭짤하게 딸려 나왔다. 500원짜리 동전이 나왔을 땐 기쁨에 못 이겨 춤까지 췄더랬다.
그러나 그 정도 돈으로는 세일러문 목걸이를 쟁취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머릿속엔 홈쇼핑의 '마감임박' 글자가 번쩍거리는 듯했다. 결국나는 눈이 돌아가고야 말았다.돈이 떨어지자 할아버지의 바지 주머니까지 뒤졌던 것이다. 처음엔 동전만 슬쩍하다가 점점간땡이가 부어서 나중엔 오천 원 지폐에까지 손을 댔다. 그러다 할아버지한테 걸려서 엄청나게 울었던 기억이 난다. 잘못을 들킨다는 게 얼마나 심장 떨리고 무서운 일인지를 몸소 깨달은 순간이었다.
중독의 DNA가 진짜 있나 싶게, 뭐 하나에 빠지면 대충 좋아하는 법이 없었다. 3사 방송사의 만화 스케줄을 줄줄 꾀고 다니며 인기 있는 만화 주제가를 모두 섭렵했고(지금도 완곡을 부를 수 있다), 심지어'마법소녀 리나'에 나오는 마법주문까지 외워서 꿈속에서 놀이터 악당들을 물리칠 때 써먹기도 했다(점점 이상한 사람 같아 보이는데, 저 그렇게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본격적으로 뭔가에 빠지기 시작한 건 만화방이 생기고나서부터였다. 만화책 한 권 대여료가 300원이었는데2년 남짓한 사이에600권을 넘게 읽었다. 초등학생이라 이 정도로 끝난 거지,돈이 더 있었으면1,000권도 가뿐히 넘겼을 게 뻔하다. 그 돈이 다 어디서 났나 했더니, 세뱃돈이나 까까 사 먹으라고 받은 돈을 죄다 여기에 몰빵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다행히 300원을 허투루 쓰진 않았다. 어떻게든 본전을 뽑아야 한단 생각으로 한 번 빌리면 3 회독 이상읽었다. 처음엔 평범하게 읽고, 두 번째엔 (말풍선 바깥에적힌) 깨알같이 작은 글씨들까지 모조리 다 읽고, 마지막엔 하이라이트 장면들만 추려서 읽었다. 만화책 덕택에 다회독과 속독(?)을 자연스레 익혔으니허투루 보낸 시간은 아니었다고 믿는다(경험이란 건뭐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법이니까).
만화방을 하도 들락거리니 사장님과 아르바이트 언니와도 친해졌다. 신작이 들어오면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아투명한비닐로 만화책을포장했다. 노동의 대가로 따끈 바삭한 팥 붕어빵도 얻어먹고, 원하는 만화책들을 공짜로읽을수 있었으며, 연체료까지 면제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화장실에 간 언니 대신 카운터를 보기도 하고, 가게 문을 닫은 날엔 대청소도 같이 했다. 그곳은나의아지트요, 너의 가게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몇 년 못 가 만화방이 문을 닫고 말았다.금단현상을 참지 못한 나는 새로운 책방을 찾아 나섰다. 거긴 만화책보다 소설이 주류인 곳이었는데 이때부터 중학교 3년 내내 판타지와 무협소설에 빠져 지냈다. 주인공들이 말도 못 하게 센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매일 판타지 소설을 읽으니 어디가 현실이고 어디가 소설 속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스스로를 중원의 숨은 고수라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을 지키는 방법부터 배워야 하는 법. 마법과 무술을 배울 순 없으니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했다.
그러나 수업시간에까지판타지 소설을 몰래읽다 뺏기기도 하고, 잠잘 시간이 돼도 '딱 한 권만 더'가 습관이 돼버렸다.빌려온 책을 다 읽고 나면 어김없이 새벽 2시가 넘었다. 성장 호르몬이 나온다는 22시부터 2시 사이를 뜬 눈으로 지새웠으니 내 키가 제대로 자랐을 리가 없다.
첩첩산중으로 당시 유행하던 넷마블 테트리스에도 빠져버렸다. "야, 우리 반 1등 테트리스 겁나 잘해."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무서웠던 복학생 언니들에게도 인기를 얻게 됐다. 그러다 언니의반성문에 학부모 사인을 대신해줬다가 학생 주임 선생님께 끌려간 적도 있었다.
새벽 4시까지 게임을 하고, 비몽사몽 한 상태로 학교에 갔다. 수업시간에는 허벅지를 꼬집으며 필사적으로 버텼지만쉬는 시간마다책상에 코를 박고 침을 질질 흘리며 기절했다.
(그다음부터는 수능, 공무원 시험, 편입 준비로 바빴으니공부에 강제 중독 됐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직장 내 마라톤 동호회에 들었을 때였다.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다른 사람들을 따라 얼떨결에 마라톤대회 10km 부문에 참가 신청을 하게 됐다. 이번엔 태릉인에 빙의가 됐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 홀로 특훈에 들어간 것이다. 120%를 연습해야 실전에서 100%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 매일 12km씩 달렸고, 그 결과 첫 대회에서 10km를 55분 00초의 기록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사실 더 빨리 들어올 수 있었는데 지나가던 아저씨의 불필요한(?) 친절 때문에 평소보다 느리게 뛰었던 게 좀 아쉽다(이 썰은 나중에 풀기로).
얼마 전엔아들 둘 키울 체력이 안돼서 근육 운동을 시작했다. 어느새 육아는 뒷전이고 앞뒤 안 가리고 운동만 했다.놀아달라는 애들 앞에서 "엄마 봐봐, 너네 이거 할 수 있어?" 하고 스쿼트를 보여줬다. 애들이 신나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따라 하니 방해받지 않고 운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삼시세끼 닭가슴살을 먹고 매일 2시간씩 운동을 했더니둘째가 돌 때쯤엔내 배에 11자 복근 라인이 보였더랬다. 그런 나를 보며남편은 또 무슨 대회에 나가냐고 물었다. 누가 상이라도 주냐고. 돈이라도 나오는 거냐며!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지겹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사실 의지가 강해서 이러는 게 아니다. 안 하면 손이 근질근질하고, 다리가 덜덜 떨리고, 찝찝한 기분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그걸 해야 마음이 편해지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다. 뭐 하나를 시작하면 뽕을 뽑아야 하고, 그걸 하느라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기 일쑤다.
뭔가에 빠져있지 않으면 불안하고, 심심해 미치겠다. (손을 덜덜 떨며) 어서, 어서, 나에게 중독될 만한 것을 달라! 이쯤 되니 내 안에 '중독의 DNA'가 있는 게 확실하다. 큰일이다. 어쩌면 내가 아빠보다 더 중독에 취약한 사람일지도……!
처음엔 우리 애들이 이 유전자를 물려받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바꿔 생각하면 오히려 이런 특징 덕분에 많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쉽게 그만둘 수 있었던 일도끝까지 물고 늘어져 이루게 된일들이 많았던 것이다.
동전의 양면처럼,늘 좋기만 한 것도 늘 나쁘기만 한 것도 없다고 믿는다. 나쁜 것에 빠지면 '중독'이지만, 좋은 것에 빠지면 '몰입'이니까.불안해질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려 한다. 우리 애들은 '중독의 유전자'가 아니라 '몰입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거라고.
삶에는 늘 객관적인 위험이 도처에 있다. 그 위험성에 눌려 살지 않으려면 의지와 용기가 필요하다. 몰입이 중독을 이길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아이들을 끝까지 격려해 줄 수 있는 용기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