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어떤 광고가 있었다. 길 가던 A에게 누군가가 사소한 친절을 베풀자, 배려받은 A가 지나가던 B를 돕고, B는 C를 돕고, C는 또 다른 D를 돕는 내용이었다. 친절이 친절을 낳는 연쇄효과를 보여주는 광고였다.
나는 긴 공부를 마치고 드디어 공무원이 됐다. 첫 월급으로 90만 원가량을 받고 수습이 끝난 후엔 120만 원을 받았으니, 2009년이란 세월을 감안해도 그리 넉넉한 금액은 아니었다.
아는 언니의 조언대로 3개월 동안은 쓰고 싶은 곳에 맘껏 썼다. 고생한 나를 위한 선물이자 주변사람들에 대한 보답 차원이었다. 합격을 축하하는 친구들에게 밥을 사고, 할머니, 할아버지 내복도 사드리고, 출근할 때 어울릴만한 단정한 겨울 외투도 몇 벌 샀다. 소소한 사치를 누리고 나니 비로소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4개월 째부터는 보험과 적금을 들고 주택청약 통장도 만들었다. 틈나는 대로 용돈기입장도 적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범위에서 차곡차곡 저축을 했지만 핸드폰비, 집에 드리는 생활비 등을 제하고 나면 남는 돈은 사실 얼마 없었다.
그러다 보니 부담이 되는 건 의외로 밥 한 끼였다. 22살에 합격해 취업이 빠른 편이었고 만나는 사람이 대부분 동생들이다 보니, 그래도 명색이 언니고 누나인데 취업도 못한 동생들에게 밥을 얻어먹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밥 때는 왜 이리도 자주 돌아오는지. 눈뜨자마자 아침밥을 먹고 나왔는데 금방 점심시간이 되고 어물어물하다 보면 어느새 또 저녁 먹을 시간이 돼있다.
돈 안 벌 땐 어떻게 다 챙겨 먹고살았을까. 혼자 먹을 땐 대충 김밥이나 빵으로 때우기 일쑤였고 식사 다운 식사를 한 건 주로 누군가와 함께일 때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대부분 언니 오빠들이다. 그들이 대기업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나보다 많아봤자 고작 한두 살 많은데 서로 밥을 사겠다며 실랑이를 벌여도 끝내 밥을 사는 쪽은 늘 상대방이었다. 가볍게 먹었지만 가격까지 가볍진 않았을, 지난날들의 밥 한 끼였다.
아는 동생과 오랜만에 부대찌개를 먹었다. 체크카드로 계산을 하고 나오는 길에 동생이 미안한 듯 말한다.
"맨날 얻어먹어서 어떡해요. 다음에 제가 돈 벌면 꼭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하지만 동생이 취업하기엔 아직 먼 여정이 남아있었다. 그 미안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나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했다.
"돈 벌면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사. 나도 학생 땐 언니오빠들한테 다 얻어먹었어. 나중에 돈 생기면 당장 너에게 갚을 수 없는 사람한테 사줘. 그 사람이 돈 벌 때쯤이면 또 다른 사람한테 사줄 수 있게."
발길이 닿는 곳마다 노란 가로등 불빛이 우리를 비췄다. 좁고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걷는 동안 초등학교 소풍날 내 몫까지 싸주신 옆집 아주머니의 김밥 한 줄이 생각났다.
그날 내가 산 밥 한 끼는 갚을 길 없는 지난날에 대한 작은 보은이었다.
회사 앞에 싱글벙글 마트라는 가게가 있었다. 사장님 부부의 얼굴은 가게 이름처럼 늘 싱글벙글했고 아침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기운찬 목소리로 맞아주셨다.
늦잠을 자느라 아침을 챙겨 먹지 못한 날, 싱글벙글 마트에 들렀다. 페스츄리 빵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가방에서 지갑을 찾는 사이, 사장님께서 아침의 주스 하나를 빵 옆에 턱 하니 세워두셨다.
"빵만 먹으면 목멕혀. 주스랑 같이 먹어요. 어차피 유통기한 얼마 안 남아서 주는 거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또 다른 날 아침이었다. 빵이랑 주스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으니 이번엔 주스를 대용량으로 바꿔주신다.
"아, 이것도 유통기한 얼마 안 남았어. 안 나갈 거 같으니까 큰 걸로 가져가요."
확인해 보면 유통기한이 적게 남은 것도 아니다. 혼자 다 먹을 수도 없는 양이라 출근하자마자 탕비실에 들렀다. 종이컵에 노란 주스를 한잔씩 옮겨 담고 직원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저도 공짜로 받은 거니 맛있게 드세요."
"어유, 혜원 씨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마트 사장님 덕분에 월요일 아침부터 정다운 인사가 오고 갔다. 뜻밖의 행운으로 기분 좋은, 싱글벙글하고 기운찬 아침이다.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그 광고처럼 사소한 친절이 또 다른 친절로 이어질 수 있게. 오늘 내가 사는 밥 한 끼가 B에게, C에게, 저 멀리 Z에게까지 닿길 기대하며이 말을 꺼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