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그것

반대로 살기

by shining days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올라왔다. 오한이 든다. 가 덜덜덜 떨리고 온몸이 쑤신다.


"너무 추운데 이불 하나만 더 주시면 안 돼요?"

"환자분. 지금 이불 덮으시면 안 돼요. 열 내려야 하니까 얼음팩 갖다 드릴게요."


이불을 달랬더니 되려 얼음팩을 주겠다는 간호사. 날 위해 하는 소리인데도 그 말이 참 야속하다. 한밤 중에 와서 또다시 열을 잰다.


"환자분. 지금 추우세요? 더우세요?"

"추워요."

"추운 거랑 더운 거랑 무슨 차이가 있어요?"

"열이 오를 땐 춥고, 열이 내릴 땐 몸이 더워요."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다시 열이 올랐다. 집에선 내 맘대로 할 수 있으니 극세사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도 두꺼운 걸로 바꿨다. 하지만 어깨만 무거워졌을 뿐 몸속 찬기는 여전했다.


이불을 덮지 않아야 빨리 낫는 걸 알면서도, 당장 추워 죽겠으니 이불을 놓을 수가 없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기며 생각했다. 나는 지금 잘못된 걸 갈망하고 있구나. 몸에 해로운 데도 놓지 못하는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이 이 이불의 연장선은 아닐까. 무언가가 부족해서 속상할 때, 나는 그것을 채우려고만 했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잘못된 걸 갈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유하면 당장은 나아진 것 같겠지만 그게 오히려 더 오래 나를 아프게 만들지도 모른다.


덮어도 덮어도 만족스럽지 않은 건 덮을 게 부족해서가 아니다. 채워도 채워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건 더 많이 채워야 해서가 아니다. 파서 그런 거다. 정작 중요한 건 덮는 게 아니라 벗는 것, 가지는 게 아니라 버리는 것 일 수도 있다. 내 생각과 반대로 살아야 오히려 건강하게 살 수도 있다.


내 삶에도 무수히 많은 이불이 있었다. 가장 큰 이불은 남의 인정을 받는 것. 정작 필요했던 건 남의 인정이 아니라 이런 모습도 괜찮다고 여기는 스스로의 인정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할 땐 나 혼자 대학원을 못 가는 게 그렇게 아쉽고 서러웠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대학원은 나에게 필요한 게 아니었다. 교사가 못 돼서 속상했는데, 그 직업이 나한테 안 맞았겠구나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기도 했다.


갈망 자체는 아무 잘못이 없을지도 모른다(이불도 그렇다). 중요한 건 나의 상태. 내가 건강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내가 바라는 갈망 또한 나를 성장하게 하는 갈망인지, 나를 갉아먹는 갈망인지 결정된다.


원하는 걸 빨리 소유하기보다 '없는 상태'를 견디며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진정 내게 필요했던 것인가', '그것이 내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가'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삶이 아플 때는 무언가를 계속 갈망하기 보단 아픈 내 몸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나아질 것이다' '약을 먹었으니 곧 괜찮아질 것이다' '아직 시간이 덜 지나서 그렇다' '나는 기다려야 한다' 생각하면서 헛된 것을 갈구하는 나를 침착하게 달래야 한다.




몸이 더워지니 이불 밖으로 다리를 내밀게 됐다. 열이 내리고 있다는 신호다. 더 이상 이불이 필요 없어진다. 아니,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몸이 회복되면서 나를 짓누르던 생각들도 밤새 가벼워진 느낌이 든다. 누군가가 날 보며 그냥 좀 편하게 살아,라고 해도 좀처럼 되지 않던 게 몸이 나아되니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이래야만 해'라고 생각했던 삶의 조건을 내려놓는다. 직업에 대한 고민이 매듭지어지지 않아도, 노력한 과정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생각한 것만큼 아이가 따라주지 않아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뭐. 될 일은 될 테고, 안될 일은 안될 테지.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때때로 아프다. 이가 덜덜 떨리고 온몸이 쑤시는데 이불이 없어 서러울 때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다. 밤새 우릴 괴롭히던 고열이 내리면 한결 개운해진 몸으로 이만하면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할 아침이 밝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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