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책과 운동화 한 켤레

따뜻하면서도 등골이 서늘했던 그날의 기억

by shining days

우리 집 우편함에 낯선 물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이게 뭐지.


얇은 책 한 권이었다. 비닐 속에 '좋은생각'이라는 네 글자가 얼핏 보였다. 이런 걸 시킨 적이 없는데 배송이 잘못 온 건가. 그런데 받는 사람을 보니 분명 우리 집 주소와 내 이름이 맞았다.


예전에 같은 학교에 다니던 오빠가 있었다. 함께 수험생활을 하면서 모르는 걸 질문하고,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똑똑한 오빠가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친오빠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려나. 서로 가정사를 알고 있어서 더 마음이 쓰이는 오빠였다.


그런 오빠가 얼마 전에 우리 집 주소를 물어봤었다. 주소는 왜, 라고 물어봤지만 곧 알게 될 거야, 라며 혼자 웃고 전화를 끊었던 게 기억이 났다. 그게 바로 이거구나.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아 들고 '오빠 고마워요. 잘 읽을 게요.'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좋은생각 책은 다음 달에도, 그다음 달에도 꼬박꼬박 우리 집 우편함으로 배송되었다. 잊을만할 때쯤이면 텅 빈 우편함을 든든하게 채우고 퇴근하는 나를 맞이했다.


오늘쯤 배송되려나. 이젠 대낮부터 책을 손꼽아 기다리게 됐다. 예상한 날에 책이 꽂혀있으면 더 반갑고 신이 났다. 와, 드디어 왔구나.


여름. 가을. 겨울. 봄.


좁은 우편함으로 12번의 작은 설렘이 들어왔다.




추석 휴일이 시작됐다. 텅 빈 기숙사에서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있는데 아침부터 핸드폰이 울렸다.


'혜원아, 오늘 우리 집에 갈래? 엄마가 너도 같이 오라셔.'


명절 내내 공부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어쩌지. 잠시 고민을 하다가 금방 준비하고 나갈게요,라고 답장을 보냈다. 옷을 고르는 동안 머릿속에는 여러 물음표들이 왔다 갔다 했다. 오빠네 어머니께서 나를 아시네? 처음 만나 뵙는데 어색하면 어떡하지? 아, 그냥 안 간다고 할걸 그랬나?


어머니께 처음으로 인사를 드렸다. 머니께서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환한 얼굴로 나를 맞아주셨다. 어머니께서 점심을 차리시는 동안 나는 오빠 책상을 힐긋 쳐다봤다가 벽지도 한번 쳐다봤다가 괜히 한번 오빠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겉으론 태연한 척했지만 어색한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영화를 같이 보자고 하셨다. 만 먹고 돌아갈 줄 알았는데... 네, 하고 대답하는 사이 어느새 오빠는 예매 화면창에 로그인하고 있었다.


추석명절이라 영화관에는 가족단위 관객들이 많았다. 가족들과 한 번도 영화를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쩌다 보니 화목한 가족의 일상을 간접체험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란히 앉은 우리 셋의 공기가 낯설면서도 어쩐지 묘하게 기분 좋았다.


저녁 외식까지 마치고 완벽(할 뻔) 했던 가족(사이에 낀)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신발 가게를 본 어머니는 마침 오빠 신발을 살 때가 됐다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셨다. 그러고는 갑자기 내 어깨를 붙드셨다.


"혜아, 네 것도 골라봐."

"네? 제 신발을요?"


편하게 고르라며 우리 둘만 가게 안에 남겨두고는 밖으로 나가셨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때부터 내 눈에 들어오는 건 신발이 아니라 그 밑에 적힌 가격표였다.


속이 탔다. 30초에 한 번씩 시계를 쳐다본 것 같다. 운동화보다 시계를 더 많이 볼 정도였다. 내가 이런 걸 어떻게 받아. 점점 패닉상태에 빠졌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어머니는 밖에서 기다리시고, 나는 아무것도 고를 수가 없고! 그런데 오빠는 자기 신발을 벌써 골라버렸다. 이렇게나 빨리?


"오빠 이거 신어봤어요?"

"응."


벌써 다 신어봤단다. 하. 이럴 때는 왜 이리 민첩해.


나는 옷과 새 신발에 익숙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친척언니의 것을 물려 입었는 데다가, 물건을 오래 쓰는 습관이 몸에 배서 새 운동화를 사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마음이 영 불편했다. 내가 이런 걸 받아도 되나. 영화와 식사만으로도 과분한데. 오늘 처음 뵀는데 선물까지 받는 건 너무 염치없는 거 같은데...


하지만 오빠마저 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급한 마음에 매장을 이리저리 뛰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하얀색 스니커즈가 눈에 띄었다. 그나마 가격대가 저렴했다. 그래, 이게 있었어.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게다가 디자인도 예뻤다.


오빠가 들고 있던 카드로 결제를 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매장 밖으로 나오는데 아직까지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끝이 아니었다. 우리가 고른 신발을 보시고는 어머니께서 약간 화(?)를 내셨다.


"혜원아, 왜 이렇게 싼 걸로 골랐어? 더 좋은 걸로 사지! 빨리 가서 다른 걸로 골라와. 더 좋은 걸로 사."


그러고는 오히려 오빠를 타박하셨다.


"야, 너는 인마, 네 것만 신경 쓰면 어떡해? 혜원이 것도 같이 좀 골라주지."


오빠 탓이 아니다. 알아서 고르겠다고 한건 나였다. 어머니께서는 좋은 신발을 신어야 몸이 편하다며 나를 매장 안으로 다시 들여보내려고 하셨다. 아니, 이게 어떻게 고른 신발인데 다시 고르라니요! 제발 살려주세요. 분명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이었는데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아니에요. 진짜 이게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진짜예요. 저는 이게 제일 좋아요. 색깔도 마음에 들고 이게 새로운 디자인으로 나온 거라서. 하, 한정판이에요!"


그 돈이 어떻게 번 돈인 줄 알고 있었다. 혼자서 오빠를 키우시느라 고생하신 걸 다 알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마음 편히 비싼 신발을 고를 수 있을까. 여전히 마뜩잖아하는 어머니께 '진짜'라는 말을 몇 번이나 더하고 나서야 겨우 신발 가게 앞을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거지만, 맘에 들었다는 거 '진짜'에요.)



다음날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져 내렸다. 성질 급한 나는 비가 이렇게 오는데도 기어코 그 운동화를 꺼냈다. 어제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새 신발에 두 발을 살포시 넣었다.


빗물에 닿자, 흰 천에 파란 물이 번지는 게 보였다. 기숙사에서 도서관까지 몇 걸음 안 걸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탁하면 다시 깨끗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공부를 하다가도 몇 번씩 그 신발을 쳐다봤다.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날 저녁, 기숙사로 돌아와서 온 힘을 다해 운동화를 빡빡 질러지만 푸른 물이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 딱 한 번밖에 못 신었는데... 단 하루 만에 예쁜 내 신발에 멍이 들어버렸다. 바깥에 신고 돌아다닐 수 없는 지경이었다.


쓸모없는 물건은 바로바로 버리는 나지만 이것만큼은 버릴 수가 없었다. 신발장 위에 올려두고 오고 가며 눈으로 자주 신었다. 푸른 멍이 든 하얀 스니커즈는 그 어떤 신발보다 내 마음속에 오래 머물렀다.




한 달에 한 번, 우편함에 '좋은생각' 책이 꽂혀있을 때마다 그 운동화가 떠올랐다. 어머니와 오빠를 떠올리는 시간이 나에겐 '좋은 생각'을 하는 시간이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책부터 펼쳐 읽었다. 얇은 책 한 권이 어찌나 많은 위로를 주던지. 좋은 글을 읽는 사람은 삐뚤어지기가 힘들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요즘 나는 어떤 생각을 하는 어른이 되었나 모르겠다.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마음을 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때보다 좋은 어른이 되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얼마 전에 서점에 갔을 때 계산대 앞에 진열된 좋은생각 책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이것도 같이 계산해 주세요, 하고 서둘러 계산대 위에 올려두었다.


좋은 어른까지는 모르겠지만, 어도 '영양가 있는 밥만큼이나 좋은 생각도 꾸준히 챙겨 먹어야 한다'는 걸 아는 어른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책을 들고 돌아오는 길에 오빠에게 오랜만에 안부인사를 보냈다.


"오빠. 잘 지내요? 어머니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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