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만 원짜리 옷을, 단돈 2만 원에 사다!

운명이라 여겼던 패딩의 최후

by shining days

한눈에 반해버렸다.

"이건 인생 패딩이야."


남자 친구(현 남편)와 가산 디지털 단지에서 저녁을 먹기로 한 날.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카톡이 왔다.

'미안. 갑자기 마무리할 일이 생겼어. 30분 정도 늦을 것 같아.'


기다리는 동안 오랜만에 옷 구경이나 해볼까. 가벼운 마음으로 아웃렛 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눈에 띄는 패딩 하나를 발견했다. 오, 저거 예쁜데?

"오늘 오신 손님들이 다 이 옷만 입어보시더라고요. 그런데 사이즈가 작게 나와서..."

나야 작게 나오면 더 좋지. 한번 입어나 볼까. 마치 신데렐라의 구두처럼 내 몸에 꼭 맞는다! 이 풍성한 털 좀 봐. 귀티가 줄줄 흐르는 고급스러움은 또 어떻고. 이거 입으니까 꼭 부잣집 딸 같네. 네가 그토록 기다리던 주인이 바로 나였구나?


(제 키는 참고로 뭐 이렇습니다.)

https://brunch.co.kr/@abcde098765/54

한껏 들뜬 마음으로 가격표를 봤다. 헉? 이게 뭐야. 할인해서 53만 원? 원가 74만 원? 침착해. 너무 놀란 티 내면 촌스러워 보인다고!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가격표를 내려놓았다. 괜히 연락이 온 척 핸드폰을 한번 쳐다봐준 뒤 "좀 더 둘러보고 올게요"라는 말을 남긴 채 유유히 매장을 빠져나왔다.


남자 친구를 만난 후에도 도저히 데이트 집중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엔 온통 패딩 생각뿐. 폭풍 검색을 해봤지만 인터넷 최저가 역시 별 차이가 없었다. 49만 원이라..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금액이네.


하필 그 땐 수입이 하나도 없을 때였다. 편입시험에 합격하자마자, 다니던 직장에 휴직 신청서를 제출했다. 공무원의 옷을 벗고 대학교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다시 허리띠를 힘껏 졸라매야 했다. 집에도 손을 벌릴 수가 없었기에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야금야금 생활비를 충당하던 중이었다.


졸업을 몇 달 앞둔 지금, 모아둔 돈은 이미 바닥이 났다. 두 달 뒤면 복직인데 카드를 긁어, 말아? 할부로 지를까? 아니야, 한 두 푼도 아닌데... 밤마다 눈 앞에 아른거리는 패딩 때문에 상사병에 걸릴 것 같았다. 하필 그렇게 비싼 옷에 꽂혀 버 가지고!


한 달 후, 운 좋게 우리 과 학술대회에서 2등을 하게 됐고 귀한 상금 30만 원이 입금되었다. 이 돈은 패딩을 사라는 신의 계시인가? 여전히 패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였다.

마침 영등포에서 약속이 있던 날, 30분 전에 일찍 도착해서 백화점으로 향했다. 나의 사랑스러운 패딩은 잘 있겠지? 작별 인사한다 치고, 마지막으로 한번 입어나 보자. 역시 다시 입어봐도 변함없이 예쁜 옷이다. 아니, 못 산다 생각하니 더 예뻐 보인다. 여긴 백화점이니까 지난번에 아웃렛에서 본 것보다 더 비싸겠지?

어.... 뭐야. 32만 원?


아무 기대 없이 가격표를 봤는데 이게 웬 떡이야? 알고 보니 똑같은 디자인으로 리뉴얼될 예정이라 기존 옷을 대폭 할인한단다. 아싸! 며칠 전에 받은 상금에 단돈 2만 원을 보태면 되잖아? 드디어 74만 원짜리 패딩을 손에 얻었다! 10만 원만 넘어도 손을 벌벌 떨던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비싼 옷을 사는 순간이었다.


그래, 원래 겨울 외투는 비싸잖아. 비싼 만큼 따뜻할 거야. 다른 패딩들을 봐봐. 죄다 칙칙한 검은색인데 이건 산뜻한 올리브색이잖아. 이런 색이 다시 나올 것 같아? 별의별 이유를 다 갖다 붙이며 그 날의 선택을 칭찬했다. 이게 내 거라니. 그토록 바라던 옷을 손에 얻고 꽤나 오랫동안 감격에 겨웠었다. 그동안 공부하느라 수고했으니까 이건 나에게 주는 졸업 선물이야! 그럼 그럼.




그 후로 8년이 지났다. 운명이라 여겼던 패딩은 케묵은 먼지와 함께 옷장 속에 갇혀있다. 지어 올 겨울엔 한 번도 안 입었다. 그 이유는 딱 2가지. 숏 패딩이라 다리가 너무 춥다는 점. 그리고 고급스러움의 원천이라 여겼던 풍성한 털이 무겁게 어깨를 짓누른다는 점. 아참, 산뜻하다 생각했던 올리브색을 보고 누군가는 북한 인민복이냐고도 했지.


점점 그 옷에 손이 안 가기 시작했다. 한두 번만 입고 드라이클리닝을 맡기자니 세탁비가 아깝고, 그렇다고 또 세탁을 건너뛰자니 1년 뒤에 발견할 찌든 때가 두려웠다. 그래서 오늘도 옷장 안에만 고이 모셔놨다.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건데. 이 옷을 사던 날 감격의 환호를 내질렀는데. 인생 패딩이라 믿었던 녀석은 볼품없고 초라한 최후를 맞이하고 있다.


오늘도 내가 집어 든 패딩은 4만 원짜리 싸구려 패딩이다. 굉장히 저렴하면서 칙칙하기 그지없는 은색 패딩. 싼 맛에 대충 입자 생각했던 그 패딩을 하루가 멀다 하고 6년째 매일매일 입고 있다. 이건 본전 뽕을 뽑아도 몇 번을 뽑았네.


참,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어. 비싸게 샀다고 반드시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고 싸게 샀다고 반드시 불만족스러운 것도 아니라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인생 이야기도 비슷더라.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적성에 안 맞아서 금세 퇴사하기도 하고, 별생각 없이 시작한 취미 생활이 오히려 대박을 치기도 니까. 박막례 할머니도 치매 위험 진단을 받아서 손녀와 함께 처음으로 호주 여행을 떠났잖아. 미국 구글 본사에 초대도 받고, 구글 CEO와 유튜브 CEO를 만나는 할머니의 위대한 여정들이, 좌절스런 치매 위험군 진단에서 출발했지 뭐야. 이래서 인생이 재미있다고 하는구나. 아무것도 예상할 수가 없어서.

우리 부모님이 이혼하신 게, 아빠가 알콜중독으로 술을 드신 게,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음에도 가난 때문에 전문대를 가게 된 게, 딸 하나만 낳고 싶었던 내가 아들 둘을 낳은 게.. 이 모든 것들이 반드시 에게 불행을 가져다줬던 건 아니었어.

살다 보니 '행운'이란 포장지로 예쁘게 배달된 '불행'도 있라. '역경'의 상자를 받아 들고 처음엔 몹시 억울했지만 막상 그 안에 들어있던 건 '감사와 행복'일 때도 있었어.


그저 눈으로만 봐선 몰라. 내 손 안에 쥐여진 초콜릿이 달콤한 맛일지, 씁쓸한 맛일지. 직접 먹어보고, 몸소 겪어봐야만 알 수 있어. 실패한 인생이라 생각했던 삶도, '좌절 극복기'의 위대한 서막일지도 모르잖아.


사실 해리포터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친구가 엄청 재미있고 유명한 책이라고 귀띔해주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다 못 읽을 뻔했어. 이모부 가족들에게 온갖 멸시를 받는 도입부가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었거든. 그런데 그 책이 이렇게 전 세계를 휩쓸 줄이야. 그 지루함 뒤에 엄청나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숨어있을 줄이야.


30분 뒤의 일도 알 수가 없어서, 절대로 내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그래서 삶이란 건 살아볼 만 한 것 같아. 3시간 뒤, 처음 해리포터를 적어 내려 가는 조앤 롤링의 역사가 내 삶에서 시작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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