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악명 높은 3명의 직원과 한 팀이 되었다.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고, 같은 팀의 동갑내기 직원은 3달째 생리 소식이 없다.
화장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나에게 위로를 건넸다.
"어휴, 어떻게 그 3명을 같이 붙여놨대니? 너 업무 조정은 언제 해준대?"
인사이동 시기가 아닐 때 복직하니, 얼마 전 퇴사한 사람의 업무를 맡게 되었다. 내 직급으로선 하기 어려운 업무였고, 하필 복직하자마자 휘몰아치듯 바빴다.
가장 힘든 건 역시 인간관계였다. 그 삼총사의 고래 싸움에서 애먼 내 등만 자꾸 터졌다.
'실수하면 끝이야. 작은 실수도 저지르면 안 돼.'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자주 악몽을 꿨으며,새벽 4시만 되면 출근 시간인가 싶어서 벌떡 일어났다. 열심히 준비해서 붙은 공무원 시험이었지만 그만둘까 생각이 들 정도로 지쳐가고 있었다. 너덜너덜 해진 상태로 퇴근 후엔 결혼 준비까지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친구의 고모님께서 저녁을 사주시겠다고 하셨다. 좋은 분이시라는 얘기만 자주 들었고 만나 뵙는 건 처음이라 무척 긴장이 됐다. 그날따라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도 곱게 하고 옷도 격식 있게 차려입었다.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된 하루를 보내고, 서둘러 퇴근을 했다. '다행이다, 아직 도착 안 하셨네.'
그때 남자 친구의 전화벨이 울렸다. '고모'라고 적혀있었다.
"아.. 저희는 여기 구경하고 있어요. 괜찮아요. 천천히 오셔도 돼요." 그가 전화를 끊었다.
"차가 많이 막히나 봐. 먼저 올라가 있으라고 하시네."
남자 친구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미리 예약도 해두셨는지, 직원 분께서 방으로 안내해주셨다.
'우와, 두 분 다 대기업에 다니신다더니 비싼 밥 사주시려나 보네? 아우.. 떨려...'
아직 남자 친구가 들어오지 않았는데 문이 닫혔다.의자에 앉자, 앞에 있는 TV가 켜지고 곧이어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혜원아, 사랑한다. 행복해라."
어라... 이게 뭐지?
"결혼 축하해요. 행복하게 사세요."
"알콩달콩 잘 살아~"
어, 뭐지? 이거.. 프러포즈... 야...?
아.. 어른들을 뵙는다는 생각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전혀 의심을 못했다. 맞아, 여긴 프러포즈하기 딱 좋은 63 빌딩이었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온 첫 장면부터 펑펑 울었다. 영상 속에서 많은 친구들이 우리의 결혼을 축하해주었고 남자 친구는 러브 액츄얼리 영화처럼 스케치북으로 사랑을 고백했다.
영상이 끝나고, 남자 친구가 꽃다발을 들고 들어왔다.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다이아 반지를 꺼냈다.
"혜원아, 나랑 결혼해 줄래?"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라 어떤 프러포즈를 해도 미리 알아챌 줄 알았다.
"눈치만 못 채게 해 줘. 난 그거면 돼."
그런데 이건 나의 완패(?)다. 1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고마워.. 흐엉엉... 그럼 고모님은 안 오시는 거야? 아까 전화 왔던 건 뭐야? 고모라고 적혀있었는데?"
"아~ 그거? 내 동생."
남자 친구는 깜찍하게도 여동생의 핸드폰 번호를 '고모'라고 저장해두었다. 동생한테 미리 부탁하고 고모랑 통화하는 척 연기한 것이다. 이 양반, 회사 잘리면 배우해도 되겠어...
"할머니, 할아버지 영상은 언제 찍었어? 집에 왔었다는 말 못 들었어."
얼마 전, 그는 휴가를 쓰고 나 몰래 우리 집엘 찾아갔다. 동영상도 찍고 자장면까지 같이 먹고 왔단다. 물론 헤어질 땐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가 왔다는 건 말씀하지 마세요. 혜원이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요!"
2014년 12월 30일.. 그렇게 2014년의 가장 행복한 밤이 지나고 있었다. 그때 먹은 음식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맛이었다.
'그래, 나를 이렇게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이 곁에 있었지.. 난 이렇게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지..'
다음 날, 다이아 반지를 끼고 출근했다. 하루 밤 사이,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내 마음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단단했고, 사람들의 어떤 말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더 이상 누구도 내 행복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바쁘게 일을 하다가도 네 번째 손가락의 다이아 반지를 보면 금세 웃음이 나왔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잊지 말아야지. 이젠 아무나 내 인생을 휘젓고 다니게 놔두지 않을 거야. 함부로 내 감정을 흔들지 못하게 할 거야.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는 이가 있으니, 내 인생의 엑스트라쯤에겐 미움받아도 괜찮아.'
지금은 뾰족 튀어나온 반지가 아이의 여린 살을 다치게 할까 봐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가끔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때마다, 마음이 울적하고 지칠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다이아반지를 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