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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co Dec 12. 2021

톰 크루즈가 삼켜버린 잭 리처 (1)

Size does matter

잭 리처 시리즈는 영국의 작가 리 차일드가 1997년에 잭 리처를 주인공으로 한 '추격자'를 발간한 이래 현재까지 꾸준히 출판되고 있는 인기 시리즈이다. 한국에도 15권가량이 번역되어 출판되어 있는데 난 이 시리즈를 상당히 좋아한다. '잭 리처'는 물론 가상의 인물이지만 난 거의 존경심을 품고 있는 수준인데 그 이유는 잭 리처가 극한의 미니멀리스트이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쓸모도 없는 물건들을 사들이고 항상 주변이 너저분한 상태인 것을 자책하며 사는 나로서는 전국을 방랑하면서 가방 하나 없이 주머니에 칫솔 한 개 넣고 다니고 물건에 애착을 갖지 않는 잭 리처가 멋져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거의 인생의 롤 모델로 삼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생활방식을 동경한다. 나도 저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활이 단순해지고 주변이 깔끔해짐은 물론 돈을 엄청나게 저축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존경하는 잭 리처를 스크린으로 볼 수 있게 된다니. 잭 리처의 영화화 소식을 듣고 나는 무척 흥분했다. 곧이어 주연이 톰 크루즈라고 발표되자 잔뜩 부풀었던 기대감이 그야말로 피시식 소리를 내며 빠져나갔지만.

원작이 있는 작품이 영화화될 때 주연이 누구이건 간에 미스캐스팅 논란이 전혀 없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글로써 표현되는 인물은 각자의 상상 속에서 입체감을 가지게 되고 그렇기에 한 인물을 두고도 각자의 머릿속에 있는 모습은 다 다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작이 유명하고 인기가 있을수록 캐스팅에 실망하는 목소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 우려를 어떤 연기자는 압도적인 연기력 혹은 카리스마로 불식시키기도 하고 어떤 이는 특수분장과 촬영 기술의 도움을 받아 막상 영화를 개봉했을 때 "뭐야. 책이랑 똑같잖아. 우와." 하는 반응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톰 크루즈의 잭 리처에 대해 실망했던 이유는 단지 '나의 잭 리처는 이렇지 않아!'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다.


소설의 잭 리처는 그야말로 거인이다. 195cm의 키에 110kg의 체중인 데다 전신이 근육 덩어리인 압도적인 신체 스펙의 소유자인 것이다. 이런 거구 역할을 서양인으로서는 상당히 아담한 체구의 톰 크루즈가 맡는다니. 이렇게만 들으면 원작 인물의 외모가 그대로 재현되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책을 읽어본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이다. 미남이라고 묘사된 주인공을 매력이 좀 부족한 배우가 맡는다던가 하는 정도의 괴리감이 아니다.  

잭 리처는 엄청난 거구라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장치이며 때로는 소설 전개를 담당한다. 소설의 상당 부분은 그의 신체 스펙과 연관되어 생기는 상황 설명에 할애되며 잦은 빈도로 등장하는 격투 장면은 짧고 굵직하다.

부연 설명을 곁들이자면 잭 리처는 방랑자 내지는 떠돌이로서 항상 낯선 이들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를 본 이들은 그를 거인이라고 표현한다. 시리즈 중 한 권에서 리처는 이야기의 전개 내내 '빅풋'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빅풋 Bigfoot: 북미 지역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거대한 신비 동물. 몸집이 매우 크고 털이 북슬북슬하며 주로 깊은 숲에서 볼 수 있다고 알려졌다.)

시리즈에서 리처는 그를 해치려는 조직들에게 쫓기기도 하고 마을 전체에게 적대시되기도 하는데, 덩치 때문에 눈에 안 띄게 다니지도 못하고 숨기도 어렵다. 그를 한 번이라도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거인을 만났다고 하거나 빅풋을 발견했다고 증언하니까.

덩치 때문에 다른 이들과 헷갈리는 일도 없고 잠입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면 숨어 들어가는 것을 애초에 포기해버리고 문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기도 한다. 잭 리처 시리즈의 클리셰로서 '눈을 확 잡아끄는 미모와 몸매의 여성'이 항상 등장하는데 (그리고 그녀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도 하나의 클리셰) 추격 혹은 도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리처는 육중한 덩치 탓에 그녀들처럼 빨리 뛸 수가 없. 이렇게 덩치 때문에 곤란을 겪는 상황이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아예 상황을 전환시키는 하나의 장치로서 작동하기도 할 정도이다.   


하지만 거대한 체격 덕분에 이득을 보는 경우가 더 많다. 악의 무리와 대결하는 리처이기에 격투 장면의 묘사에 상당히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는데, 그의 격투 스타일은 그야말로 묵직하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싸움꾼이기도 했고 오래 군에 몸 담았던 퇴역 군인으로서 훈련된 격투가이기도 한 리처는 쓸데없이 싸움을 질질 끌지 않도록 그의 체급을 백분 활용한다. 그럼에도 격투 장면 묘사가 그리 긴 이유는 싸움이 벌어지는 찰나의 순간에 리처는 수많은 계산을 머릿속으로 하기 때문인데, 공격의 각도와 상대방의 다음 공격을 예측하는 등의 치밀한 계산 과정과 시뮬레이션을 묘사하는 것이 길 뿐 격투 자체는 싱겁다 싶을 정도로 짧고 깔끔하다.

리처의 상대가 되지 않는 오합지졸들은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파괴력의 펀치 한 방이면 순식간에 무력화되고 두 방을 맞으면 얼굴을 재건하는 성형 시술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된다. 상대가 뛰어난 격투가일 경우이거나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경우에는 리처도 고전하긴 하지만 그 역시 묵직하고 속도감 있게 결판 지어진다. 땅바닥을 구르며 엎치락뒤치락 싸운다거나 잔뜩 상처를 입은 채로 허덕이며 간신히 방어하느라 급급한 모습은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전혀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등장하지 않는다.


잭 리처 시리즈의 팬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 아닐까 싶은데, 이런 속 후련하고도 깔끔한 액션이 가능한 이유는 리처의 거구에서 나오는 타격감 때문이다. 이 '타격감'이란 액션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인데 이것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예는 바로 마동석이 아닐까 싶다.

많은 이들이 비슷비슷한 '마동석표' 액션 영화들이 이젠 식상하다고 말하는데도 그의 새로운 영화가 항상 흥행에 성공하는 이유는 이 타격감을 스크린 너머로 실감 나게 전달할 수 있는 보기 드문 배우이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액션을 뛰어나게 소화할 수 있는 배우들은 많다. 그러나 '범죄도시'에서 선보였듯이 주먹도 아니고 손바닥으로 따귀 한 대를 쳤는데 뒤이어 "야. 숨 쉬어. 숨!"이라는 대사를 하는 것을 관객들에게 납득하게 만들 수 있는 배우는 마동석 이외에 잘 떠오르지 않는다.

마동석이 '아저씨'에서 원빈이 했듯이 카람빗을 든 악당을 상대로 장시간 합을 주고받으며 나이프 파이팅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봐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마동석은 역시 원펀치로 상대를 녹다운시키는 묵직하고 파괴력 강한 액션이 잘 어울리며 그 모습은 잭 리처와 상당히 닮아있다. (액션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외양이 아니라) 이런 타격감을 마동석이 잘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그의 무지막지한 체급 덕분이다.


그럼 잭 리처를 맡기에 적합한 비주얼의 배우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음. 당장에 줄줄 떠오르진 않는다. 사실 흔히 만나기 쉬운 타입은 아니니까. 굳이 묻는다면 전성기 때의 돌프 룬드그렌의 느낌이 가장 적합하겠다 싶다. 그리고 많이 양보하고 인내한 차선책으로, 몸을 무지막지하게 키운 벤 애플렉 (무기력한 느낌이 드는 배우이지만 연기력으로 커버 가능하지 않을까) 정도면 싱크로율이 그래도 높지 않을까.

이런 느낌 혹은


이런 느낌이어야지


이렇게 귀염뽀짝한 느낌이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야기가 좀 다른 곳으로 새긴 했는데 다시 잭 리처로 돌아와서, 톰 크루즈는 엄청난 배우다. 할리우드의 거물이고 전무후무한 스타성을 지녔으며 연기력 또한 대단하다. 60세를 목전에 둔 지금에도 그의 외모보다 우월한 배우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미남이며 매력이 흘러넘친다. 그의 최근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거의 액션 영화이기에 액션 배우로 불러도 손색이 없으며 대스타임에도 영화 속의 스턴트를 직접 해낼 정도로 열의가  넘치고 배짱도 좋다. 한 마디로 완벽에 가까운 배우인 것이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톰 크루즈의 잭 리처에 대해 유감을 표할 예정이지만 사실 난 톰 크루즈의 팬이다. 불행하늘 슬펐던 학창 시절에 톰 크루즈는 마음이 녹아내릴 것 같은 미소로 내게 행복한 환상을 품게 해 주었고 섹시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아 줌으로써 시궁창 같은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해변의 바에서 셰이커를 흔들던 톰 크루즈가 어찌나 멋지던지 당시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던 용돈을 쪼개고 모아 칵테일 비디오테이프를 샀으며 대사 전부를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보았다.

그로 인해 미국에만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는 환상을 가지게 되어 어린 나이에 아메리칸드림을 었고 어른이 되면 꼭 바텐더가 되어야지 하는 결심을 했더랬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그것을 잠시나마 실현할 정도로 맹목적이었다)   

액션 블록버스터라고 거창하게 개봉했지만 욕만 잔뜩 들어먹고 소리 소문 없이 묻힌 그의 영화 '미이라'도 나는 관대한 마음으로 감상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매력을 깎아내리는 요소로 그가 단신이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 점은 조금도 톰 크루즈의 단점으로 적용되지 않았다. 아니, 톰 크루즈인데? 기럭지가 좀 짧은데 그래서 뭐? 톰 크루즈가 섹시하지 않게 되려면 단신이라는 것보다 훨씬 더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나는 이토록 톰 크루즈에게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잭 리처에 대해서는 아니다. 아담하고 친근한 신장의 잭 리처는 단지 각색의 문제라거나 관점의 차이, 혹은 연기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원작의 뼈대를 멋대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더 이상 잭 리처가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비유하자면 '타운'을 영화화하면서 배경 도시를 보스턴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긴다거나, 가네시로 카즈키의 'Go'를 스크린으로 옮기면서 주인공인 스기하라가 재일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인 것으로 설정을 바꾸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과묵하고 점잖은 데드풀은 더 이상 데드풀이 아니지 않은가?

사실 '잭 리처'는 괜찮은 영화이다. 나름 재미있는 액션 스릴러 영화이지만 잘 만들어진 잭 리처 영화는 아니라는 말이다. 잭 리처는 오롯이 잭 리처라는 매력적인 캐릭터의 힘으로 운영되는 스토리이고 그런 리처의 변동 불가능한 아이덴티티는 두 가지이다. 바로 그가 (전직) 헌병이라는 것과 거인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각색 과정에서 건드려도 되는 세부 사항으로 취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톰 크루즈는 액션을 훌륭하게 해내는 배우이고 몸도 잘 관리되어 있어 배우의 체급에서 기대할 수 있는 정도 이상의 타격감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강한 타격감'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괴물 같은' 타격감이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톰 크루즈에게 두들겨 맞는다면 무척이나 아플 것이다. 톰 크루즈가 아니라 비쩍 마른 동네 할배한테 한 대 제대로 맞아도 이가 부러지고 코가 가라앉을 수 있다. 현실에서의 폭력은 더 리얼하고 잔인하며 큰 상처를 남기니까.

하지만 영화에서는 '영화적 허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죽도록 맞아도 주인공은 멀쩡하거나 한 대만 스쳐도 상대는 픽픽 쓰러지도록 표현할 수 있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되더라도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위력을 증강하거나 가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시각적으로 단번에 보여줄 수 있는 요소가 바로 체급인 것이고 잭 리처에게 그 부분은 필수 요소이다.

마동석이 주연한 영화에서 그의 캐릭터는 항상 과장되었지만 관객들이 그의 액션을 보며 통쾌해하는 이유는 말이 안 되는 상황도 납득이 되게 만드는 마동석의 피지컬 때문이다. 동석이 형에게 따귀 한 대 맞으면 정말 기절할 것 같으며 이미 죽은 좀비도 다시 죽일 것 같으니까. 쉽게 말해 잭 리처 역으로 톰 크루즈가 캐스팅되는 것은 마동석을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을 몇십 편 시리즈로 써놓고는 영화화하면서 주인공으로 원빈을 캐스팅하는 격이나 마찬가지이다.


잭 리처는 특유의 깐족거림으로 결투 전에 경고를 날린다. "처음은 너, 코를 뭉개 줄 거고 다음은 너,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을 원작의 잭 리처가 읊을 때는 '오오. 저 괴물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하고 감탄하며 그의 액션을 두근두근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에서 톰 크루즈가 저런 대사를 날리는 것을 보자 '어이어이 아저씨. 괜찮겠어? 너무 무리하지는 말라고.' 하는 우려부터 들었다. 톰 크루즈가 유독 연약해 보여서가 아니다. 단지 그가 '일반인'이기 때문이지. 다시 말하지만, 잭 리처는 체형 그 자체로 반전을 꾀할 수 있는 거인이다.


톰 크루즈가 잭 리처 시리즈를 망쳐버린 이유는 단지 그의 아담한 신장 때문만이 아니다. 다음 편에서 좀 더 얘기할 테지만, 사실 잭 리처를 제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잭 리처가 왜 대단한지를 관객들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하고 이를 위한 설명을 영화는 오글거리는 대사 몇 줄로 해결하려 한다.

영화의 2편인 '잭 리처: 네버 고 백'에서는 영화의 초반부터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이 리처가 현역이었던 시절에 대한 칭송을 입이 마르도록 한다.

"선배님은 이곳의 전설이시지요."라는 낯 간지러운 찬사를 면전에 대고 해 대는가 하면 '이곳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인물, 어느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신적인 군인,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의 사도' 등 관객들이 다 민망할 정도의 미사여구로 그를 묘사하려 한다. 보는 내 얼굴이 다 빨개질 지경인데 톰 크루즈는 겸허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아니, 그래서 이 양반이 대체 왜 대단한 건데?' 하는 의문이 들뿐이다. 대단한 모습은 하나도 보여주지 않으니까.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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