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ico Dec 13. 2021

톰 크루즈만 있었고, 잭 리처는 없었다 (2)

나의 잭 리처는 이렇지 않아!

톰 크루즈가 잭 리처를 충실히 재현하는 것에 실패한 이유는 배우와 캐릭터의 체급 차이 때문만이 아니다. 주연과 함께 제작 또한 맡았던 톰 크루즈는 잭 리처라는 큰 옷을 입기 위해 이곳저곳을 수선한다. 문제는 수선 과정에서 본연의 디자인이 무너져서 전혀 다른 새로운 옷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새 옷은 예쁘지조차 않았다.

영화의 1편에서는 실종된 양아치의 집에 조사를 하러 갔다가 패거리의 기습을 받고 드잡이를 하는데, 잭 리처의 캐릭터에 충실하게 영화를 만들었다면 나올 수 없는 장면이다.

원작의 잭 리처는 기껏 동네 건달들을 상대로 드잡이 따윈 하지 않는다. 6명까지는 단 한 대도 맞지 않는 선에서 정리가 가능하고 리처에게 쥐어박히고도 심기일전해서 반격하는 건달 따위는 책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된다고? 당연하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 것처럼 묘사된 것이 잭 리처이고 그렇기에 소설의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잭 리처 시리즈는 세계 명작 전집이나 고전 작품이 아니다. 괴물 같은 덩치의 거인이 나쁜 놈들 패준다는데 보고 통쾌하면 그만이지 좀 과장되면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그토록 오랫동안 시리즈가 이어지는 동안 리처가 기습당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는 텅 빈 공간을 보고도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예상할 수 있고 자신을 노리는 이들의 계획 또한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두뇌 회전에 타고난 피지컬에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전투 기술까지 더해 그는 싸움의 신이라 할 만하다. 설정이 지나치다고? 물론 그렇다. 독자들과 소설에서 등장하는 여자들이 그에게 반하는 이유도 (그래서 그녀들이 리처와 함께 침대에 뛰어드는 이유도) 그런 주인공 보정 덕이다.

애초에 현실에서 접할 일 없는 액션 스릴러 시리즈물에서 현실적인 주인공을 찾을 이유가 뭔가. 호쾌하게 악인들을 징벌하는 오락물을 원하는 이들이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잭 리처 시리즈를 집어 들기 마련이고 리처는 그런 이들의 취향을 더없이 만족시키도록 군더더기 없이 창조된 인물이다.

현실적인 주인공을 원한다면 다른 책을 읽으면 된다. 비만인 데다 독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년의 경찰 여간부가 통찰력으로 범인을 추리해 체포하는 내용의 시리즈도 있고 (베라 스탠호프 시리즈) 누가 뭐래도 이 편이 훨씬 현실적인 인간형이다. 잭 리처는 권선징악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더없이 실용적이고도 기능적인 주인공인 것이다.

그를 영상으로 옮기기 위해 굳이 현실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은 필요 없다는 뜻이다. 실감 나는 격투를 위해 톰 크루즈가 상대와 합을 주고받다가 몇 대나 두들겨 맞고 기습까지 당해 뒤통수에 거대한 혹을 달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 리처라면 빡. 빡. 하고 두 대 때리면 두 명이 뻗는데 말이지.


영화의 2편인 잭 리처: 네버 고 백에서는 더하다. 심지어는 터너 소령과 둘이 합심해서 덤볐음에도 청부업자 하나에게 사이좋게 흠씬 두들겨 맞는 데다 영화의 마지막 대결에서도 리처는 같은 이에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터진다. 이쯤 되면 리처의 체격에 대한 약간의 각색 정도가 아니라 원작 파괴에 가깝다

체급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손 치더라도 영화는 여러 부분에서 원작의 리처를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 버린다. 1편의 마지막 격투신을 보면, 자이 코트니가 분한 악당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고 훈련된 암살자 내지는 킬러에 가깝다. 물론 이런 이를 상대로는 원작의 리처도 꽤 고전한다.

그런데 서로 다치고 지친 상태에서 톰 크루즈는 악당을 무장해제시킨 뒤에 자신도 쥐고 있던 총을 내려놓고 맨주먹으로 그를 상대한다. 심지어 상대의 체급이 훨씬 우월한데도. 덕분에 리처는 승리하긴 하지만 흠씬 두들겨 맞는다. 이 장면을 보고 리처가 정정당당하다며 감탄할 이가 있을까? 실소를 자아낼 뿐이다.

액션 영화이기에 맨몸으로 싸우는 쪽이 더 볼거리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원작의 리처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니까. 리처는 군인의 행동 양식이 몸에 배어 있기에 가장 효율적이고 피해가 적은 방식을 계산하여 싸운다. 간단하게 싸움을 끝낼 수 있다면 먼저 공격을 하기도 하고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이용해 전투에 임한다. 총이 있으면 상대가 맨손이라도 주저 없이 쏘는 인물인 것이다.

심지어는 비무장으로 도주하는 적의 뒤통수에 대고 총을 쏴 갈기는 일도 서슴지 않는 인물이 원작의 리처이다. 그런데 총을 내려놓고 엎치락뒤치락 뒹굴면서 싸운다고? 이건 단지 허세 가득하고 불필요한 묘사일 뿐만 아니라 리처의 아이덴티티에 반하는 행동이다.

게다가 부패 형사 에머슨을 처단하는 장면도 어처구니가 없다. 여주인공을 인간 방패 삼아 자신을 완벽히 엄폐한 상대를 조준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확히 맞히는 것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여주인공을 같이 쏘아서 꿰뚫어버린다면 모를까. (톰 크루즈를 겨냥한 총알은 죄다 비껴가는 것은 당연하고) 이건 비현실적이다 영화적 허용이다 뭐다 하기 이전에 그냥 판타지에 가깝다. 격투의 신에 가까운 리처를 인간급으로 끌어내려 놓고는 굳이 판타지 같은 장면을 추가하는 이유가 대체 뭔지 모르겠다.


그 외에 몇 가지를 더 지적하자면, 원작의 리처는 덩치가 덩치인 만큼 과묵하고 점잔을 떨 것 같지만 의외로 깐족거림이 심하고 사람을 약 올려서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다. 누가 한 마디 하면 리처는 열 마디로 갚아준다. 원작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리처가 이죽대며 꼰대들을 열 받게 하는 것을 감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톰 크루즈는 시종일관 무게를 잡고 절대 잘난 척을 하지 않으며 항상 신사적이다. 심지어는 옷이 단벌임에도 맵시가 있으며 외양도 깔끔하다.

원작의 리처는 가방 하나 없이 떠돌아다니기에 옷이 더러워지면 버리고 가장 싼 옷을 사 입는다. 거구인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를 찾는 것이 관건이기에 디자인 따위를 따질 겨를이 없다. 그렇기에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는 차림새로 다니거나 남루해 보이기 일쑤이고 심지어는 그 덩치에 핑크색 티셔츠를 입고 다니기도 한다. 톰 크루즈 또한 단벌 차림이지만 모텔에서 열심히 티셔츠를 빨아 입는데, 이는 빨래하는 동안 맨 몸으로 있어야 하는 톰 크루즈의 식스팩을 감상하게 하기 위한 서비스이며 조각 같은 그의 상반신을 보고 설레는 헬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이다. 잭 리처와 빨래는 공존하지 않는다.


듣기로는 잭 리처 영화화를 기획할 당시에 톰 크루즈가 관심을 보이며 원작자인 리 차일드에게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자신이 주연을 맡고 싶지만 비주얼의 괴리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제작에만 참여하겠다고 허락을 구했다고 하는데, 리 차일드가 흔쾌히 동의했다고 한다. 그리고 잭 리처 시리즈의 팬들이 웅성대는 가운데 톰 크루즈가 잭 리처를 잘 표현해냈다며 만족을 표했다고 한다.

사실 리 차일드가 이해는 간다. 다른 이도 아니고 톰 크루즈가 관심을 표시하는데 내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가 작가라도 톰 크루즈가 자신이 주연을 맡겠다고 한다면 운을 채 떼기도 전에 고개가 부러져라 끄덕일 것이다. 잭 리처가 뭐야, 17세의 한국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한 장수 시리즈라도 톰 크루즈가 연기하겠다면 그 역할에 딱이라며 찬성하겠다.

그러니까 재앙의 불꽃은 톰 크루즈가 역할에 욕심을 내었기에 생겨난 것이다. 톰 형. 욕심이 과하였소.

형이 거기서 왜 나와...?

그가 잭 리처 역할을 탐내면 안 되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나이 차이이다. 첫 작품에서 리처는 30대 중반의 나이로 등장한다. 시리즈를 더해가며 그 또한 나이를 먹긴 하지만 실제 시간을 착실하게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서 그는 계속 그 나이 언저리에서 머문다. 해리 포터 시리즈처럼 새 작품이 출간될 때마다 일 년씩 나이를 먹었다면 그는 가장 최근작에서 노화를 한탄하며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은 몸에 불평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도 한창때이며 여전히 신나게 악당들을 쥐어박고 다닌다.

사실 2012년에 잭 리처를 개봉했을 때에 톰 크루즈는 이미 50대였고 잭 리처와의 나이 차이가 20년 가까이 났지만 놀랍게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이는 톰 크루즈가 어마무시하고 미친 동안의 소유자이면서도 몸 관리에 완벽을 기했기에 가능한 것인데 강도 높은 액션신을 선보이면서도 나이로 인해 버거워 보인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잭 리처 시리즈는 서른 권 가까이 되고 영미권에서 인기가 높다. 그리고 그중 두 편이 영화화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영화화될 가능성도 있다. 지금 톰 크루즈가 아무리 동안이라고 해도 그는 나이를 계속 먹을 것이고 원작과의 나이 차이로 인해 그가 주연에서 물러나야 하는 시점은 그리 멀지 않았다. 톰 크루즈는 60대를 목전에 두었는데 시리즈는 겨우 두 편 영화화되었으니까.

007 시리즈처럼 대를 물려가며 진행되는 시리즈라면 몰라도, 톰 크루즈는 주연 욕심을 내는 바람에 잭 리처가 장수 영화 시리즈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버린 것이다. 앞으로 두어 편 정도는 몰라도 70대의 할배가 맨몸으로 한 마을 전체를 초토화시키는 30대의 잭 리처 역할을 고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영화 잭 리처는 상당히 재미있는 액션 영화이다. 그에 원작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자체로 시리즈를 몇 편 시작했어도 될 정도로. 하지만 인지도 높은 원작이 존재하는데 스타 주연 배우가 자신에게 맞도록 캐릭터를 변형함으로써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다.

그저 평범한 액션 영화를 보고자 한다면 큰 결함이 없지만 기존의 잭 리처 팬들을 만족시키기엔 어렵다. 잘 만들어진 액션 영화이지만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더 이상 정통 스파이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처럼 잭 리처 또한 잭 리처가 아닌 톰 크루즈 표 영화가 되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앞으로의 시리즈가 존재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단 두 편으로 잭 리처 시리즈의 영화화가 끝나버렸다고 해도 놀랍거나 아쉽지 않다. 별로 특별할 것이 없으니 더 진행되기도 어려운 시리즈가 되어버렸으니까. 

안녕 리처. 스크린에서 만나서 반가웠어. 내가 본 이가 당신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