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의 시각이 될 것인가, 사건의 경위를 알고 싶은가.
관광객의 시각이 될 것인가, 사건의 경위를 알고 싶은가.
1) 사소한 재료로 구성된 서사
프로이트에 의하면 무의식은 낮에 있었던 아주 사소한 경험을 재료로 사용하여 꿈을 만든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전날 강렬했던 사건이나 쉽게 생각나는 기억은 무의식이 꿈의 재료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만일 꿈의 해석가가 되려면 깃들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꿈의 재료에서 무의식의 진실을 찾아내야 합니다.
문학가들도 무의식이 꿈의 서사를 구성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을 사용합니다. 작가들은 작품에 쓰고 싶은 이야기를 묵직한 상징언어에 담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핵심적 서사를 품고 있는 문장을 스치듯 읽고 지나가게 서술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독서가는 피부로 전해지는 맥박의 진동을 따라 몸속 깊은 곳의 생명의 리듬감을 파악하려는 것처럼 읽기를 해야 합니다. 헤밍웨이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 중에서 가장 인상 깊고 재미있게 다가왔었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그처럼 읽어보겠습니다.
2) 쓰레기더미가 되어가는 큰 고기의 등뼈
다음은 ‘노인과 바다’의 끝 페이지에 나오는 글입니다. 그 단락을 옮겨 적기 전에 짧게 글의 구성을 보겠습니다. (민음사 128-129쪽)
부둣가 관광객 일행은 해류에 밀려가는 큰 고기의 등뼈를 가리키며 웨이터에게 저게 뭐냐고 묻습니다. 이에 웨이터는 노인과 청새치의 위대한 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려 합니다. “티부론이죠. 상어랍니다”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운을 띄웁니다.
그러나 관광객에게 노인과 청새치의 위대한 싸움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관광객은 “상어가 저토록 잘생기고 멋진 꼬리를 달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요”라며 응답합니다. 같은 시간에 원두막에서 노인은 사자 꿈을 꾸며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럼 전문을 읽어보겠습니다.
【 동풍이 항구 밖에서 줄곧 거센 파도를 일으키며 불고 있는 동안 그 등뼈는 수면 뒤에 모습을 드러낸 채 해류에 휩쓸려 흔들리고 있었다.
“ 저게 뭐죠?” 여자가 웨이터에게 물으면서 이제 해류를 타고 바다로 밀려 나가기를 기다리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그 엄청나게 큰 고기의 길쭉한 등뼈를 손으로 가리켰다.
“티부론이죠. 상어랍니다.” 웨이터가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상어가 저토록 잘생기고 멋진 꼬리를 달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요.”
“나도 몰랐는걸.”여자와 동행인 남자가 말했다.
길 위쪽의 오두막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 (민음사 128-129쪽)
3) 지배하는 자들 – 노인, 청새치
① 사자 꿈을 꾸는 노인
84일간 고기를 잡지 못해 가장 운 없는 존재, ‘살라오’가 된 노인은 늘 사자 꿈을 꿉니다. 노인의 꿈에는 폭풍우도, 여자도, 큰 고기도, 죽은 아내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사자들만이 나타납니다. 바다거북을 잡으면 눈을 망치게 된다 하지만 노인은 수많은 바다 거북이를 잡고 눈이 멀쩡함을 보여줍니다.
언젠가 노인은 쿠바출신의 몸집이 크고 부둣가에서 가장 힘이 센 검둥이와 팔씨름을 하였습니다. 일요일 아침에 시작한 팔씨름은 월요일 아침이 되어서야 승부가 났습니다. 손톱 밑에서 피가 배어 나왔고 심판은 쉬기 위해 네 시간마다 교체했지만 노인의 눈은 팔뚝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월요일 새벽에 노인은 있는 힘을 다해 검둥이의 손을 테이블에 눕히고야 맙니다.
상어의 간을 팔아 벌어들인 돈으로 모터보트를 사는 부류들은 바다를 남성형인 ‘엘마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바다를 단지 돈을 버는 일터이거나 심지어 적대자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노인은 바다를 스페인말인 ‘라 마르’라고 부릅니다. ‘라 마르’는 바다를 애정을 가지고 부를 때 사용하는 여성형 스페인말입니다. 노인에게 바다는 큰 은혜를 베풀 주지만 빼앗기도 하는 그 무엇입니다.
84일간 고기를 잡지 못해 가장 불운한 자, ‘살라오’가 되었던 노인은 언제나 그렇듯 다시 먼바다로 나아갑니다.
② 배를 끌고 해류를 거슬러 가는 청새치
청새치는 노인이 내린 미끼를 비스듬히 입에 물고 네 시간이 지나도록 해류를 거슬러 배를 끌며 먼바다로 헤엄쳐 나갑니다. 노인은 낚싯줄에서 “자신이 선택한 진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큰 고기의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기는 요란하게 물 위를 뛰어오르며 배를 무서운 속도로 끌고 갑니다. 줄을 팽팽히 잡고 있는 노인은 배안에서 내동댕이쳐집니다. 청새치는 그의 힘으로 “온갖 올가미나 덫이나 계책이 미치지 못하는 먼바다의 깊고 어두운 물속에 잠겨 있”고자 줄을 끌고 나가려는가 봅니다.
고기는 쉽게 그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긴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낚싯줄이 서서히 올라오더니 배 앞쪽 수면이 부풀어 오르면서 마침내 고기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시커먼 그림자처럼 보이다 모습을 드러낸 고기는 노인의 배보다 60센티미터도 넘게 큰 놈이었습니다.
청새치는 노인과 함께 싸울 자격이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함께 있는 것이고, 정오부터 줄곧 이렇게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노인은 말합니다. “저 고기 놈이 되어 보고 싶구나”, “오직 내 의지, 내 지혜에 맞서 모든 걸 갖고 싸우고 있는 저놈”이 되고 싶구나.
노인과 청새치는 같은 부류입니다. “형제야, 난 지금껏 너보다 크고, 너보다 아름답고, 또 너보다 침착하고 고결한 놈은 보지 못했구나. 자, 그럼 이리 와서 나를 죽여보려무나. 누가 누구를 죽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4) 웨이터가 전해주려 한 이야기
【“티부론이죠. 상어랍니다.” 웨이터가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
파도에 휩쓸려가는 등뼈와 아름다운 꼬리만 남긴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노인의 작살이 고기(청새치)의 가슴지느러미 뒤쪽 옆구리를 뚫고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자, “바다는 고기의 심장에서 뿜어 나오는 피로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습니다. 밧줄로 고기를 뱃전에 묶어놓고 노인과 청새치는 나란히 항해를 합니다. 노인은 생각합니다. “고기가 나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고기를 데려가고 있는 것인가”. 그때 상어의 습격이 시작됩니다.
먹구름처럼 퍼지는 피 냄새를 맡고 상어는 차례를 기다리며 고기를 다 먹어치울 기세로 공격해 옵니다. 노인은 상어와 싸울 수 있었습니다. 고기를 뜯어먹는 상어의 대가리가 물 밖으로 나오자 노인은 밧줄이 묶인 작살을 머리에 푹 찔러 넣습니다. 상어는 숨이 끊어져 물속으로 가라앉았지만 작살과 밧줄도 가져가 버렸습니다.
노인은 말합니다. “이보게, 늙은이, 너무 생각하지 말게. 이대로 곧장 배를 몰다가 불운이 닥치면 그때 맞서 싸우시지.” 희망을 버린다는 것은 죄악이라 생각하는 노인은 작살은 잃었지만 노의 손잡이에다 칼을 단단히 매어놓습니다. 또 상어가 나타납니다.
손이 아파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지만 칼을 묶어놓은 노를 집어 들어 통증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기를 물어뜯는 상어의 눈을 향해 내려 찌릅니다. 다른 상어가 물 위로 나오자 칼을 뽑아 다시 상어의 같은 부위를 찌르고 척추와 골통 사이에 칼날을 내리꽂아버립니다. 상어는 죽고 고기는 많은 부분이 뜯겨나갔습니다.
또 다른 상어가 나타납니다. 노인은 말합니다. “고기야, 난 이렇게 멀리 나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말이다. 고기야. 미안하구나”. 노인은 다시 칼날이 묶여있는 노를 두 손을 잡습니다. 상어가 고기를 뜯게끔 놓아두었다가 칼로 골통을 내려 찌릅니다. 상어의 뒤틀림에 칼날이 부러집니다. 저쪽에서 다른 상어 두마라기 다가옵니다. 노인은 이번에는 배에 있는 몽둥이 듭니다. 상어는 고기를 물어뜯고 노인은 몽둥이로 내려칩니다.
부둣가의 불빛이 보이고 노인은 이제 싸움이 끝났구나 생각했는데, 다시 상어 떼가 몰려옵니다. 상어의 머리를 내려치던 몽둥이도 상어가 낚아채 사라져 버렸습니다. 노인은 키에서 손잡이를 잡아 빼서 상어를 향해 내려칩니다. 내려치고, 내려치고, 내려치고. 이제 뜯어먹을 고기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고 상어도 사라졌습니다.
노인은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는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살라오’가 되어서도 노인은 다시 먼바다로 나아가 위대한 친구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사자의 꿈은 지속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