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SNS나 요즘 유행하는 베스트셀러들을 가끔 접할 때면, 너무나도 쉽게 우리들은 이 문장과 마주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라.”
나를 사랑하라는 따뜻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이 문장은, 자기 스스로를 수많은 경쟁과 비교들 속에서 깎아내리고 있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시대적인 위로처럼 보인다. SNS에서 자주 보이는 인플루언서들의 감성적인 포스팅이나, 가끔 연예인과 같은 유명인들이 말하는 이 문장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처럼 제시되고는 한다. 처음 이 문장을 사용한 사람 또한, 자기 자신의 부족한 모습도 긍정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는, 문장이 하고자 하는 말에 다른 의미를 담지 않고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순수한 이유로 이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따뜻하게만 느껴지는 이 문장은, 한때 가장 무책임하지만 잔인한 말의 의미를 담고서 내게 다가왔었다. 과거의 나는 이 문장을 실패의 이유를 합리화하기 위한 이유로 삼거나, 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변명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건 나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는 건강한 자기 긍정의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의지를 꺾음과 동시에 잠시 현실의 고통을 잊게 만들었던 정신적인 마취제에 가까웠다. 마취에서 깬 현실을 마주했을 때 내가 해석한 달콤한 의미와는 달리 더 큰 고통이 다가온다는 사실들을 알고 있음에도 외면한 채, 나는 그 순간을 위로받고 싶어서 기대고는 했다. 예를 들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노력했던 어떤 일들을 예상과는 달리 실패하며 깊은 실망감에 빠져있을 때, 이 말이면 해결되는 듯했다.
“괜찮아. 원래 내가 그렇게까지 해보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잖아.”
“내가 못하는 게 아니고 안 할 뿐이야. 저들이 나의 가치를 몰라주는 것이 문제지.”
“안 하면, 내가 아니고 너네가 손해지.”
이는 나의 부족함을 냉정하게 분석하며, 다음의 실패를 대비하기 위해 보완하려는 노력을 가로막기에 이르렀다. 내가 실패했던 것은 내가 부족하거나 미숙해서가 아닌, 나를 알아봐 주지 못했던 모든 것들의 문제이거나, 내가 운이 없었다는 탓으로 돌렸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라’라는 근사한 말을 내 입맛대로 변형해 그 뒤에 숨어서, 합리화하며 실패를 당연시하는 나를 정당화시켰다. 그건 나를 사랑한다는 이름의 ‘정신승리’에 가까웠고, 더 나은 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내 발로 걷어차 버렸던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특히 내가 초라하고 한없이 보잘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회가 정해 놓았던 시간표에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한참 뒤처져 있고,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이 너무 싫고 낯설기만 했던 20대의 나는, 도저히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다.
이런 나에게 있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라”는 말은, 거울 속의 내가 너무나 낯설고 싫어서 그 모습을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 치고 있었던 나를 계속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살라는 저주와 같이 들렸다. 마치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당신이 있는 공간을 사랑하라.”라는 말을 하는 것과 같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내 감옥을 사랑하고 싶지 않았고, 감옥을 탈출하고 싶었다.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진정으로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부족함과 실패들, 그리고 이로 인한 아픈 상처들을 포장해서 외면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걸 마주하며, “나는 부족해서 실패했고, 그래서 너무나 아팠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런 나약했고 힘들어했던 나조차도 내가 겪어왔던 나였고, 나의 일부였음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실패에 주저앉은 나를 그 자리에 방치한 채 그대로 바라보며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피 흘리며 아파하는 나를 괜찮다고 다독이며, 일으켜 세워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다시 걸을 수 있도록 부축하며, 한 걸음씩이라도 같이 내디뎌 갈 수 있는 치료를 하는 것과 같았다.
가장 어려웠지만 나의 실패와 아픔을 인정하고 보듬어주며 다시 나아갈 힘을 길러주는 세상에서 가장 어렵지만 적극적인 행위였다는 것으로 이제야 나는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다. 이건 나 자신에게 가장 좋은 부모가 되어주는 일임에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