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내려오니 식욕이 돋는구나.”
이뇨제로 살이 8키로가 빠진 아빠는 내가 내려와서 식욕이 늘었다고 했다. 살이 빠졌다던 아빠의 얼굴을, 그런 아빠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며 간병하는 엄마의 얼굴을 봐야했다. 그분들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괜찮은지 직접 내 눈으로 봐야했다.
“니가 평범하게 살면 좋겠다.”
언젠가 엄마는 내가 평범하게 살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엄마의 바람을 지키지 못했다. 아이도 가지지 못했고 남편은 대학병원 응급실과 입원실을 드나들며 아팠다. 시어머니의 전화를 수신차단했고 친언니와는 절연했다. 목구멍이 긴장되어 침삼킴은 이제 의식적으로 온 얼굴과 목에 힘을 주어야 겨우 삼킬 수 있는 강박장애가 되었다. 침이 삼켜지지 않아 밤을 지새우는 일이 이제 내게 평범한 일이 되어버렸다.
엉망진창만 남을 삶이었다. 불행으로만 기억될 삶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쩌면 이 은하계에서 일등할 정도로 부모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그 사랑이 응집되어 결코 깨지지 않을 별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전기장판 사러가자.”
아빠는 운동 후 앉지도 않고 내 이부자리를 봐주었다. 방바닥을 물티슈로 닦고 바닥이 푹신하게 이불을 까셨다. 쓰던 전기장판이 없단다. 점심을 먹고 아빠와 엄마는 바로 마트에 가서 내가 쓸 전기장판을 샀다. 세면대 바로 위에 있는 아빠의 칫솔꽂이에는 아빠 칫솔 대신 내가 쓸 칫솔이 꽂혔다.
“추울텐데…”
반바지를 입고 부엌에서 일하는 나를 엄마가 계속 신경쓴다. 티비를 보던 엄마는 자러 들어간다고 했고 나는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 사이 내가 일하던 의자에 담요가 덮혔다. 하나는 의자를 완전히 감싼 걸 보니 깔고 앉으라는 걸테고 다른 하나는 덮으라는 걸테다.
자식이 부모를 위해 바닥을 닦고 설거지를 하는 일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닌데, 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아빠는 곁을 맴돌았다. 아빠는 마치 벌을 서듯 계속 서서 설거지하는 걸 보았다. 고무장갑을 끼지 않은 게 신경쓰인다며 엄마는 몇 번이고 설거지하는 내 곁을 오갔다. 빨래를 널어달라고 말을 했으면서 엄마는 같이 빨래를 널고 청소기를 가져다 달라는 나의 부탁에 아빠는 그냥 청소기를 돌려버렸다.
겉으로는 똑같아 보이는 엄마와 아빠의 우주가 궤도를 틀었다. 은하계의 행성과 별이 조금씩 움직여 궤도를 맞춘다. 어차피 며칠 뒤면 다시 제자리에 가야할텐데 수많은 별들이 예쁘게도 별자리를 새로 만든다. 남편의 사랑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꿋꿋하게 자기 자리마냥 꽂혀있는 칫솔에, 마치 봄처럼 놓여있는 담요에 마음이 흔들했다. 내가 혼자 버틴 게 아니었구나, 아빠와 엄마로부터 받은 사랑의 결집이 단단하게 나를 붙잡고 있었던게다.
“너도 나에게 사랑받고 싶지 않니?”
고학력 며느리가 싫다는 소리와 함께 들었던 시어머니의 말들이 생각난다. 정확히는 “너는 나 따라와. 나랑 걷자.”라고 말하고 남편에게서 나를 떼어놓고 일방적으로 쏟아부은 말이다. 시어머니는 모두 내 탓인 것처럼 말했었다. 내게 사랑을 주지 못하는 당신이 피해자이고 이 모든 건 내가 부족한 탓이라고. 사랑을 받기 위해 애를 얼마나 썼어야 할까. 미친듯이 애를 썼으면 정말 사랑 받았을까, 아니면 하녀가 되었을까. 한동안 이런 질문들이 목구멍을 가득 메웠다. 숨도 쉴 수 없고 침도 삼켜지지 않는 날들이 블랙홀이 되었었다.
부모의 은하계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야 시어머니는 조금도 나를 사랑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다시 알았다. 오랜 시간 사랑받지못해 괴로웠는데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시어머니는 항상 조건을 달았다. 니가 잘해야지, 니가 아침을 차려야지, 니가 전화를 해야지, 니가 살갑게 굴어야지, 니가 커피를 타와야지. 나는 모든 일의 원인이 되고 모든 일의 잘못이 되었었다. 처음부터 시어머니는 나를 예쁘게 볼 마음이 없었다. 결혼하고 8년이 지나서야 남편과 나는 그 사실을 명백히 받아들였다. 슬펐다. 시어머니의 은하계에서 나는 영원히 궤도에 오를 수 없는 우주미아였다.
지금도 엄마 행성과 아빠 별은 열심히 궤도를 맞춘다. 자식이 머무르는 며칠 동안 부모의 은하계는 자식이 축이 되어 새로운 시간을 만들고 새로운 공간을 탄생시킨다. 부모의 우주 중심에 내가 있다. 우주 미아였던 그 시간들을 영원히 잊을 순 없겠지만 엄마와 아빠가 반짝이를 듬뿍 묻힌 별이 나에게 있다. 그 별이 반짝일 때마다 하루는 구원되고 삶은 앞으로 나아갈 거라 믿는다. 반짝이는 잘 떨어지니까 곳곳에 떨어져 반짝반짝거리겠지...?
+헤어지려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날선 평가와 지적은 잠시 내려놓으셔도 괜찮습니다. 비방을 위한 공유는 사양하겠습니다. 아무런 평가 없이 그저 자유로워질 수 있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