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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Navy Apr 12. 2020

너, 내 집사가 돼라

짬타이거 줍냥기 1

2017년


8년간 브레이크 없는 불도저 같은 군생활을 하고 있던 나에게 갑작스레 휴식과도 같은 교관 임무가 부여되었다. 그리고 3년간의 삭막했던 도심 속 부대를 벗어나 한적한 산 자락에 있는 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루하루 치열했던 업무에서 벗어나 내 전공이기도 하고 자신 있는 분야를 가르치 한동안 잊고 살았던 '여유'라는 것이 마음속에서 몽글몽글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교관 업무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던 뜨거운 여름날, 야생 호랑이 같은 우리 부대 짬 타이거(부대 짬밥을 먹는 길고양이, 덩치도 좋고 가끔 새도 잡아먹을 만큼 날렵)가 아닌 기운 없이 비쩍 마르고 품종 고양이 같아 보이는 녀석이 나타났다.


난 한눈에 사람이 키우던 녀석이라는 걸 알았다. 언뜻 보기에도 장모종 같아 보이는 녀석의 털이 짧게 미용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사람이 다가가도 전혀 무서워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다가왔다.


얼핏 보기에도 그 녀석은 뼈대가 보일 정도로 말라있었다. 본가에 있는 랑이(당시 9살, 길거리 캐스팅)가 생각나 얼른 고양이 사료를 사 와서 밥을 주기 시작했다.



사진상으로는 통통해 보이지만 다 털빨이었다.

(나중에 구조 후 병원에서 잰 몸무게는 2.9킬로... 본가에 있는 랑이는 6.5킬로..)


내가 다가가면 도망치기 바쁘던 짬 타이거들과 달리 이 녀석은 내가 출근하기도 전부터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어딘가 근처 풀 숲에 숨어있다가 내가 부르면 애옹-애옹- 거리며 튀어나왔다. 물론 다른 짬 타이거들한테는 매일 맞고 다니는 듯했다. 가끔 사무실 문을 열어놓으면 안까지 들어와서는 한 숨 자고 나가기도 했다. 숲 속에서의 생활이 많이 고단해 보였다. 이 녀석은 원래 부잣집에서 자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석을 앞두고 연휴 동안 쉴 생각에 기뻤던 마음보다 이 녀석 밥을 누가 챙겨주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가을이 되어가면서 점점 아침저녁으로 기온은 뚝뚝 떨어져 가는데 먹이사냥도 못하는 이 아이를 두고 휴가를 가기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신중히 고민한 끝에 이 녀석은 이대로는 이 곳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거둬들이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워낙 순둥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구조라고 할 것도 없이 내가 우쭈쭈- 하면 와서 안기는 이 녀석을 안고 근처 동물병원으로 갔다. 분명 아픈 곳이 없진 않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검진 결과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일단 심한 구내염과 피부병은 둘째 치고, 가장 큰 문제는 심장이었다. 이 녀석은 선천적일지도 모르는 심근 비대증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다 중성화 수술과 미용은 되어있는데, 기본적인 예방접종 항체가 하나도 없었고, 추정 나이는 대략 10살 전후로 보인다고 했다.


아마도 이 녀석의 전 주인은 중성화 수술은 했지만 예방접종은 하지 않았고(했다 하더라도 항체가 없어졌거나), 심장병이 있는 나이 든 이 녀석을 근처에 민가 하나 없는 외딴 산속에 버려두고 간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담담히 설명해주시는 수의사님 앞에서 주책없는 눈물만 줄줄 흘렀다. 이 녀석의 처지가 너무 불쌍해서.. 처음 나를 찾아왔을 때의 그 고단했던 모습이 떠올라서...

(숲 속이 낯설어서인지 짬타이거들에게 시달려서인지 내 사무실에 자주 들어와서 쉬다 가곤 했다)


(꼬질꼬질한 솜방망이가 포인트)



이어서 들었던 수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나를 더 슬프게 했다. 지금 이 녀석은 당장 내일 무지개 다리를 건너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고.


일단 심근 비대증 때문에라도 평생 약을 먹고살아야 되는데, 그 날부터 이 순둥한 녀석과의 약 먹이기 씨름이 시작되었다.  먹지 않으려는 자와 먹이려는 자. 그 싸움의 끝은 결국..


다시 동물병원을 찾아갔을 때 수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이 아이의 묘생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거라면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약을 억지로 먹이지 않고 편안히 살다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수의사 선생님도 내 뜻을 존중해 주셨고, 동물병원에서는 하얀색 코트를 입은 이 녀석의 이름을 흰둥이라고 지어주셨다.


안식년과도 같았던 교관 임무가 끝나고 다시 각박한 도심 속으로 돌아왔지만 지금 내 곁에는 언제 무지개 다리를 건너도 이상하지 않다던 이 녀석이 코를 드르렁거리면서 잘 자고 있다. 다시 돌아온 이 곳의 생활이 예전처럼 삭막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코 고는 소리 너무 귀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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