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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엄마 Jun 02. 2020

맥시멀리스트의 수줍은 고백

다정한 일기 by 혜진


은결님, 지난주에 소개해주신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사람,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을 설레는 마음으로 장바구니에 넣어두고는 '책을 모아서 6월 굿즈'까지 한꺼번에 받으려고 여태 결제를 미루고 있었답니다.

네, 저는 굿즈도 참말 좋아하고 - 가끔 책을 사는 건가 굿즈를 사는 건가 싶어서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 책을 쌓아두기도 참말 좋아합니다.


여기서 퀴즈, 저 책장에 있는 책 중 몇% 나 읽었을까요?

답은 김영하 작가가 모 프로그램에서 했던 멘트로 대체합니다.


"책은요,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산 책 중에 읽는 거예요"






'뜻밖의 가전 자랑'같은 사진입니다만, 요즘 저의 가장 충실한 일꾼들을 소개합니다.


충실한 일꾼 1호, 이사 오면서 통 큰 제 동생이 선물로 보내준 건조기.

전 처음 써봤는데, 정말 신세계입니다. '띵띠리리-' 가벼운 부저로 건조가 다 끝났다며 일꾼 1호가 신호를 보냅니다. 소리를 듣자마자 문을 열고,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는 수건을 꺼냅니다. 유연제의 은은한 향기를 담은 기분 좋게 바짝 마른 수건. 저녁 먹고 아이랑 느긋해지고 싶은 그 시간, 빨래 널러 추운 베란다로 출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새삼 감동해버렸습니다.


충실한 일꾼 2호, 로봇 청소기! 요 아이도 정말 요물입니다. 대륙의 뛰어난 기술에 솔직히 놀랬습니다.

생각보다 청소를 깨끗하게 잘하는 데다, 스마트폰 앱으로 여러 기능을 지정해서 사용할 수 있어요.

토요일 이른 아침, 저는 일꾼 2호를 호출합니다. 남편과 '내가 일을 더하네, 더 힘드네' 싸울 것도 없이, 가족들 잠든 사이에 2호를 돌립니다. "저는 청소가 제일 좋아요"라며 어색한 기계 소리를 내는 2호. 저는 무척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 덕분에 남편이랑 신경전을 덜 벌이게 됐거든요.


마지막 충실한 일꾼 3호, 고조 시대 식기 세척기. 요 아인 사용한 지 거의 10년이 되지 싶네요.


집안일이냐, 육아냐 누가 저에게 경중을 묻는다면 저는 고민 않고 '육아'입니다. 집안일에 드는 시간과 품은 최대한 아끼고 싶습니다. 최대한 좋은 컨디션으로, 좋은 에너지로 아이와 있고 싶습니다.


저는 타임 푸어니까요.





미니멀리스트를 실천하는 분들을 보면, 저도 동경하는 마음이 듭니다.

얼마 전에 읽은 신미경 작가의 '나의 최소 취향 이야기'에서 작가의 단출한 옷장을 보며, 살짝 질투심이 들기도 했더랬습니다. 단정한 일상, 간결한 삶, 단단한 몸.


부럽다-라고 느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살짝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깔끔하고 단정한 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부지런해져야 하는지 잘 아니까요. 게다가 빈 곳에 무언가를 채워 넣고 싶은 욕구를 덜어내는 그 마음도 얼마나 부지런할까 싶어, 저는 나름의 이런 기준을 세웠답니다.



타임 푸어로 사는 동안은 맥시멀리스트로 누리겠습니다.




퇴근 후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서, 부지런히 카레를 만들었습니다. 은결님도 아시겠지만, 퇴근하고 집에 오면 제 몸이 음식이 되는데 - 파김치- , 아이 먹이려면 부지런히 또 뭘 만들어야 해요.

집에 오자마자 엉덩이 한번 붙이지 못하고 부지런히 식사 준비하느라 피곤함이 극에 달해있는데 아이가 그럽니다.



"엄마, 요리 안 하고 나랑 그냥 놀면 좋겠다"



그때 아차, 싶었어요. 내가 왜 이렇게 바쁘지?  우리 식구 잘 살아보겠다고 시간과 품을 팔아 돈을 벌고 있는데 내가 왜 집에서까지 시간을 팔고 있지? 집에서만은 그냥 누리면 안 될까?


요리도 가능하면 해 먹이려고 하지만, 몸이 너무 힘들면 죄책감 없이 시켜먹기도 해요. 시가, 천정 엄마네서 적극 반찬 공수해 와서 먹고요.

무엇보다 저의 시간을 아껴주는 1-3호 일꾼들을 적극 활용해요. 집안일에 시간을 들이는 대신, 아이 숙제를 봐주고 같이 놉니다. 청소기 돌려놓고 혼자 글 쓰고 책 읽는 시간도 갖고요.






저는 아직도 스마트폰보단 다이어리를 펴고 일기를 쓰는 쪽이 좋고, 전자책보단 종이책이 훨씬 좋은 아날로그형 인간입니다. 머신으로 내려주는 아메리카노보다 천천히 내려주는 드립 커피가 더 좋고요.  


속도보단 내실이 중요하다고 믿는, 도무지 이 시대가 바라는 인재상 따위엔 들지 않는 느린 사람이지만, 내 시간을 벌어주는 일이라면 부지런히 위임하고 싶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언젠간 나도 -라는 마음으로 미니멀리스트를 동경하지만 지금은, 타임 푸어로 사는 지금은, 최대한 내 시간을 아껴주는 일꾼들로 꽉 채우고 맥시멀리스트의 삶을 누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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