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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엄마 Jun 23. 2020

같이 나이 드는 애정 작가가 있다는 것,

다정한 일기 by 혜진

은결님의 '아무튼, 가오리', 에쿠니 가오리에 대한 애정 듬뿍 담긴 글을 읽고 저도 마음이 몽글해졌답니다. 읽다가 오랜만에 대학교 때 교제했던 첫사랑이 떠올라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그땐 하루하루가 참 힘들어서 살이 쪽쪽 빠졌었는데!) 손에 쥔 소설이 '정말 내 얘기 같다'는 동질감을 줄 때, 그 작가한테 홀딱 빠지게 되지 않나요? 은결님에게 에쿠니 가오리가 그랬듯이, 저에게도 애정 작가가 있어요. 김애란, 읽는 자체로도 제게 큰 힘을 주었던 작가요.


IMF 사태가 터진 직후에 대학을 입학했고, 졸업 즈음엔 기업마다 대규모 신규 채용을 줄이고 있었어요. 대학 입학보다 훨씬 더 힘든 취업난에 시달리며 자존심과 자존감은 바닥을 기었어요. 처음엔 멋도 모르고 대기업에 지원서를 넣었다가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조차 없기에, 눈을 내려 중견기업 중심으로 원서를 부지런히 넣었지요. 중견기업 면접 자리에서도 족족 고배를 마시자, 다시 눈을 내려 중소기업으로. 눈을 내릴수록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은 잦아졌지만, 깊어지는 내 '마음의 흠집'은 어쩐답니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회생활의 첫 발을 내딘 곳은 일본에서 물품을 수입하던 작은 무역 회사. 20대 최고의 화두는 '어디에 취업해서 초봉이 얼마냐'인데, 친구들과의 대화에 낄 수 조차 없는 그런 볼품없는 회사라고 생각했어요.

인지도 있는 회사, 누가 어디 다니냐고 물으면 이름이라도 들어봄직한 회사로 다니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열심히 이직 준비를 했지만, 그 조그만 회사에서 경력직으로 옮겨 가기도 쉽지 않더라고요. 결국엔 회사 이름은 들어봤지만 고용 형태는 불안정한 생활이 시작되었어요. 그렇게 길어질진 몰랐는데, 자그마치 20대의 절반을 비정규직으로 보냈네요.

 

"바람이 계절을 거둬가듯 세월이 언니로부터 앗아간 것들이 있을 테죠? 단순히 '기회비용'이라고만 하기엔 아쉽게 놓쳐버려 아직도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도. 말해도 어쩔 수 없어 홀로 감당해야 할 비밀과 사연들도요. 그래서 사실 오늘 언니가 8년 동안 임용이 안 됐었단 얘기를 들었을 때 가슴이 먹먹했어요. 8년. 8년이라니. 괄호 속에 갇힌 물음표처럼 칸에 갇혀 조금씩 시들어갔을 언니의 스물넷, 스물다섯, 스물여섯.... 서른하나가 가늠이 안 됐거든요. - 비행운 중 서른, 292p-


서른이라는 단편 소설엔 열심히 공부해서 들어갔지만 끊임없이 알바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하고, 억척같이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이 모든 게 경험과 지혜로 남아' 성장시킬 것이라 믿는 '나'가 나와요. 큰돈을 벌 수 있단 전 남자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대규모 불법 다단계 집단에 들어가 다 같이 둘러앉아 꿀꿀이 죽을 먹고, 감시 하에 하루에 수십 통의 전화를 돌리는 말도 안 되는 수용 생활. "꿈이라는 단어를 듣는데 가슴 한쪽이 싸한 게 찌르르 아픈 것도 같고 좋은 것도 같고"라는 문장을 읽으며 얼마나 울컥했는지...


5년간의 비정규직 생활은 중소기업에 입사할 때 주었던 '마음의 흠집'보다 더한 무력감을 주었어요. 똑같이 일해도 월급은 반밖에 되지 않으며 같이 일해서 낸 성과인데 나에겐 성과급이 나오지 않았고, 교육에 들어갈 때마다 참가자 리스트에 적힌 내 이름 옆엔 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주홍글씨처럼 생겨져 있었으니까요. 무엇보다, 네가 열심히 살지 않아서 그런 자리에 있는 거라고, 노오력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단 무언의 질책들이 제일 힘들었죠. (노오력보다는 열심히 상관들 비위 맞추고 겉과 속이 다른 언어생활을 했더니,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더군요) 그때 김애란의 단편 소설, 비행운은 저에게 숨구멍 같은 소설이었어요.

'두근두근 내 인생' '달려라 아비'에서 재기 발랄한 글톤을 보여주었던 그녀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조금씩 바뀌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책이 '바깥은 여름'


그날 내가 두 돌도 안 된 영우한테 장난으로 "영우야, 오늘 엄마 생일인데 뭐해줄 거야?"하고 물었어. 그랬더니 영우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그 말도 못 하던 애가 잠시 고민하더니 갑자기 막 손뼉을 치더라고. 영우가 나한테 손뼉 쳐줬어. 태어났다고....-바깥은 여름 중, 입동 36p-


후진하던 어린이집 차에 치여 잃어버린 아들. 이쪽에선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조차 없는데, 바깥은 여전한 일상으로 분주한. "다른 사람들은 몰라"라는 문장에 저도 그만 눈물이 떨어집니다. 내 마음에선 폭풍우가 이는데, 바깥은 평화로워 보이는 그 이상한 상황을 아이가 아프면서 자주 겪었기에.


80년생 동갑내기. IMF로 국공립대 커트라인이 수직 상승하는 걸 본 나이. 졸업 후 취업할 곳이 없어 처절하게 눈과 마음이 낮춰진 나이. 그럼에도 친구들에게 있어 보이고 싶어 아주 사소한 디테일에 목숨 걸었던 나이. 그리고 결혼할 나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중요한 관점이 달라진 나이. 아이가 커가는 걸 조금 여유 있게 볼 수 있게 된 나이. 그리고 노후를 조금씩 조금씩 준비해 가는 나이.

좋아하는 동갑내기 작가가 있다는 건, 이런 느낌이에요. 시대를 공감하며 같이 살아가고, 같이 힘들어하고, 너만 그랬던 거 아니구나 라는 위안을 얻는. 은결님 덕에, 오랜만에 김애란 작가의 산문집을 꺼내서 읽어봅니다.




"어찌 보면 쉬운 말 같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처럼 단순한 말들을 어렵게 이해해가는 과정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요즘 나는 '우리는 누군가와 반드시 두 번 만나는데, 한 번은 서로 같은 나이였을 때, 다른 한 번은 나중에 상대의 나이가 됐을 때 만나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살다 보면 가끔은 두 번째 만남이 훨씬 좋기도 하다는 것도. 그 '좋음'은 슬픔을 동반한 좋음인 경우가 많지만" - 잊기 좋은 이름, 146P


그리고 좋아하는 동갑내기 작가가 있다는 건,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내 엄마의 나이가 되는 매 순간의 기쁨과 슬픔을 말하지 않아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 그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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